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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업글할매 책방 #5

by 업글할매

역시나 제목과 표지의 힘이 세다. ​우리들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워낙 유명했었기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 제목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나 보다. ​책 표지 또한 얼마나 예쁜지…​알록달록 동화 속의 그림 같다.

정지아 작가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시더라. ​저는 구례에 살고 있고 있고요 키우는 게 많습니다.배추도 키우고 무도 키우고 고양이 네 마리도 키우고 개 두 마리도 키우고97세 된 어머니도 키우고 있어요.


참 말씀을 소박하고 구수하게 하신다.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게 하는 그런 작가님이다. ​유시민 작가님이 정말 재미있다고 적극 추천하시는 책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신 정지아 작가님은 책 속에서 일부러 웃기려고 의도적으로 노력도 하셨고 ​최선을 다해서 가벼워지려고

많은 힘을 가하셨단다.



요즘 세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치산에 대한 이해가 있을까 생각도 많이 해보셨는데 ​실제로 어느 20대 독자분의 리뷰에 빨치산이 지리산 옆에 있는 산이냐고 물어보신 분도 있단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지아 작가님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을 쓰면서 ​빨치산이 뭔지도 모르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빨치산이라고 하면 무조건 거부감부터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거라서 ​이번 책에서는 작가님이 생전 안 하시던 책의 전략을 짜고 시작하셨단다.​ 무조건 경쾌하고 웃겨야 된다는 최고의 전략을 짠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소설로 읽으셔야 하는데 많은 분들이 다큐로 읽으려고 한단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소설이니까 제발 소설로 읽어 달라는 정지아 작가님의 말씀이 참 유쾌하시고 재미있으시다.

소설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지아 작가님의 대답이 기가 막힌다. 소설이라는 것은 진실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다.


정지아 작가님의 이름인 “지아”도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오신 것이란다. 그래서 “지아”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지리산하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이미 타고 나신 것 같다.

소설의 시작이 참 어마어마하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었단다.​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정지아 작가님의 문체가 정말 작가님스럽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재미있다. 주인공 고아리의 이름 역시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이란다.​주인공 고아리는 남의 상갓집 갈 때마다 머리를 굴린단다.​얼마쯤이어야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단다.​다른 사람이 얼마나 내는지 은근슬쩍 알아도 보고 ​보통이면 그 정도내고 조금 더 마음이 있으면 몇만 원 더 내고 ​평생 볼 사람이면 나를 잊을 수 없게 아주 많이 내면서 그렇게 살았단다.

이제야 나는 한국에서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낼 때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구나하고 조금 공부가 됐다.​여러모로 한국 사람들은 신경 쓰고 살아야 할 것이 많아서 피곤할 것 같다.

아버지가 보증을 선 여자는 야반도주를 했지만 ​오죽하면 도망을 쳤겠냐면서 고아리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으시는 비쩍 마른 아버지가 시래깃국을 먹을 때 ​그 여자는 아버지 돈으로 삼겹살을 배불리 먹었을 거라는 추측이 차라리 고아리는 믿을 만하단다.​살아보니까 추측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고나서 뜯긴 사람은 그 빚을 갚느라고 있는 대로 고생을 하지만 ​막상 돈 뛰어먹고 도망간 사람들은 잘도 먹고사는 것이 현실이다.​절대로 빚보증은 서지 말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장례식에 어느 노파분이 찾아오셨는데 아버지를 보고 ​누가 3초 영감 아니랄까봐 참말로 싱겁게 가부렀소이~~라고 한탄을 하셨단다.​쐬주 한 고뿌 마시는디 딱 3초 걸린다고 3초 영감이요. ​고뿌에 이빠이 따라서 한방에 마셔불제~~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전라도 사투리가 이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원 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들었다.​원래 이렇게 구성지고 찰졌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고 정겹다.


쐬주만 마시는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어느 날 시바스 리갈을 보내드렸더니 ​단골로 다니던 술집에서 쐬주 한 박스랑 바꾸셨단다.​몇 년 뒤인가, 취업한 제자가 로열 살루트 32년 산을 선물했단다.​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고가의 위스키를 정성스레 싸서 택배로 보냈더니 ​돌아온 아버지 말이 정말 가관이었단다. ​쐬주랑도 안 바꽈주는 것을 뭘라고 보냈냐고 하신다.

시골 사람들은 시바스 리갈은 쐬주로 바꿔줘도 그것보다도 엄청나게 더 비싼 로열 살루트는 쐬주로 안 바꿔준단다.​박정희 대통령이 마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열 살루트를 모르는 것이다. ​참 순박하다.​나도 모르는 로열 살루트를 그 지리산 구석에 사시는 양반들이 어찌 알겠는가…​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이라도 내가 즐겨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난 이런 시골 사람들의 약간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순박한 모습들이 너무도 정겹다.​그 옛날 징글징글하게 정겹게 살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고아리는 말한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하지도 않았다.​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이부진이나 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왜 그리도 빨리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정지아 작가님의 글 하나하나가 이리도 재미있고 멋있을 수가 없다. ​빨치산의 딸이 쓴 책을 왜 MZ 세대들이 열광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이 책 속에 있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고아리는 늘 왜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왔을까가 궁금했단다.​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전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는 의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갱이였던 아버지는 고향에서 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단다. ​“글먼 고향 놥두고 워디로 간다냐?” ​결코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아버지는 그 덕분에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었단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왔단다.​ 열일곱여덟이나 됐을 노랑머리의 오거리 슈퍼 손녀란다. ​어떻게 우리 아버지랑 아냐고 물어보니까 담배친구란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우다가 할배한테 들케가꼬 꿀밤을 맞았단다. ​최소한 교복은 벗고 피우는 것이양심이라는 할배의 말에 양심에 따라 학교를 때려치우고는 할배랑 같이 담배 피고 술 마시면서 친구가 됐단다. ​영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베트남 엄마를 둔 아이한테 할배가 그랬단다. ​너희 엄마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그렇게 친구가 됐단다.​그러면서 공부하자고 할배가 매일 꼬셨단다.​미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아이에게 붙으면 술 사준다고 했단다. ​붙으면 술 사준다고 해놓고… 할배는 씨… 약속도 안 지키고… 할배와 노랑머리 아이하고의 진한 우정에 목이 멘다. ​아버지 해방일지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빨갱이라도 내 고향 구례에서 아버지가 인심 잃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가신 모습이다.​요즘 같으면 어디 함부로 담배 피운다고 할배가 야단을 칠 수 있겠는가…​그렇게 야단 쳐주었다고 친구가 되기는 하겠는가…​그 시절의 이런 따뜻한 모습들이 참 그립다. ​“긍게 사람이지~~“라면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가난한 빨치산의 장례식에는 날고 기는 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없을 전복죽이 있었다. ​떡집 언니가 따뜻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고아리의 마음 또한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단다. ​조문객들 입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갓집에서 전복죽 묵어보기는 난생처음이라고… ​나 역시 장례식장에 그 귀한 전복죽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상주 한 사람도 아닌 찾아와 주신 조문객들 모두에게 이런 따뜻한 마음을 쓸 수 있는지 ​요즘같이 삭막한 세상에서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아버지를 유난히 따르던 학수라는 청년이 어느 날 아버지 볼에 난 상처를 보고는 그냥 다친 상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그 길로 아버지를 모시고 노인정으로 가서 엄포를 놓았단다. ​아부지, 먼 일 있으면 밤이고 새복이고 전화허씨요.나가 만사제끼고 부리나케 달래와서 싹 다 아작을 내불랑게!


작가님 표현에 의하면 불학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무식이고 나발이고 내 뒤에 듬직한 자식이 있다고 모두의 앞에서 입증한 셈이니까 아버지가 무척 행복해하셨단다. ​비록 친 아들은 아니더라도 남의 열 아들이 안 부러우셨을 것이다.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의 이런 불학무식한 방법이 ​때로는 더 확실하게 먹힐 때가 있다. ​너무 체면 따지고 교양머리만 찾다가는 오히려 화를 당하기가 더 쉽다. ​내 가족 지키겠다는 것에 그따위 체면이나 교양머리가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선 눈이 뒤집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아리의 담배 피우다 들킨 사건에서 우리 딸은 절대 담배 태우고 그런 애가 아니라고 우겨대는 엄마 한테 아버지가 엄숙하게 종지부를 찍으셨단다. ​넘의 딸이 담배 피우면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면 호기심이여? 그것이 바고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람이 무신 헥명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으셨단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정지아 작가님은 말씀하신다. ​난 지금까지 블랙 코미디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별로 크게 웃기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대박 블랙 코미디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의 블랙 코미디! ​배를 잡고 웃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통쾌하게 웃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정지아 작가님이시다. 온 동네가 다 아는 빨갱이의 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마흔 넘어서까지 발버둥 치면서 살아왔다는 작가님이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작가님은 말씀하신다. ​쉰이 넘어서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으셨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가슴이 시리다.

고향에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것이 천지이며​고향에는 사람 냄새 넘치는 사람으로 그득하단다. 빨치산의 빨갱이 딸이 쓴 책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빨갱이의 인생이 아니었다.​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묵묵히 전해주는 그런 인간 빨갱이의 삶이다. ​그래서인지 빨갱이로 살아오신 정지아 작가님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전혀 외롭지 않아서 너무도 맘이 놓였다.

빨갱이의 딸이었던 정지아 작가님이 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꼭 써야만 했는지 ​반드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징하다. 한 마디로 징한 인생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해방시켜 드리는 책이다. ​왜 유시민 작가가 그토록 극찬을 했는지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가 간다.

갑자기 지리산에 가보고 싶어졌다. 피아골과 반내골이라는 곳도 가보고 싶고 섬진강 자락을 따라 한 없이 걸어보고도 싶다.​구례에도 직접 가서 정지아 작가님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탄생하게 된 그곳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파전에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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