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책방 이야기
일본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판매된, 밀리언 셀러였던 《 초역 니체의 말 》의 저자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 초역 붓다의 말 》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작가님은, 일본 최고의 니체 전문가로 알려진 만큼, 오랫동안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하신 분이다.
매일이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의 급류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불안정한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어디엔가 기대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기댈 곳은 밖이 아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이라는 것을, 《 초역 붓다의 말 》 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멈출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 다스리고 단단히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초역‘이라는 단어가 생소해서 한 번 찾아봤다.
초역이란, 원전에 담긴 붓다의 메시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번역이란다.
《 초역 붓다의 말 》, 《 초역 부처의 말 》, 《 초역 니체의 말 》 이런 식으로 제목이 달리면, 겁 내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가 있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단순히 종교적인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일상의 소란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고, 삶을 단순하고도 아름답게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 주는 깊은 지혜의 이야기인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삶의 방향을 바로잡고, 진정한 행복을 마주하도록 돕는 실천적 철학인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어쩌다 한 번 절에 발을 들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철학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어본다.
화려함 대신 단순함이, 소음 대신 고요함이 깃든 그 공간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면서, 복잡한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바로 붓다의 철학이 만들어 내는 진정한 위로와 평온함이라는 것을, 《 초역 붓다의 말 》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작년인가,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 초역 부처의 말 》이라는 책이 나왔었다. 《 초역 붓다의 말 》과 제목이 너무도 비슷해서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봤나 싶었다.
같은 듯하면서도 약간 뉘앙스가 다른 ‘부처’와 ‘붓다’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부처’는 한국적이고 이미 우리들한테 익숙한 표현이면서,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반면 ‘붓다’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자 (Buddha)를 그대로 음역 한 표현이라고 한다. 주로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를 직접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되면서, 철학적이고 보편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 초역 부처의 말 》은 스님이 쓰신 책답게, 전통 불교나 대중적인 정서를 담아, 보다 친숙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 같고, 《 초역 붓다의 말 》은 일본 최고의 니체 전문가답게, 불교가 가진 철학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서, 종교적인 색채를 덜어내고, 현대적인 독자들에게 더 널리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건방진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너무도 감사하게도 두 권의 책 모두, ’초역‘이라는 단어 덕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목차
1장: 인간관계에 대하여
2장: 마음을 다스리는 법
3장: 오직 나만의 길을 가라
4장: 욕망을 비우고 고통에서 벗어나라
5장: 현명한 삶을 사는 법
6장: 모두 비우고 가볍게 살라
7장: 지혜롭게 나이 드는 법
“그가 어디에서 왔건 개의치 말라!”
그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 하나 그의 몸가짐, 말을 보라.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하신다.
몸가짐이 바르고, 수치심을 알며,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든, 그는 이미 고귀한 사람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상은 종종 외모나 출신,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단호하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되물으면서, 오직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야말로 진짜 가치를 증명한다고 가르침을 주신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든, 우리는 이미 고귀한 사람이다”라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타인을 바라볼 때, 우리가 얼마나 외적인 조건들에 얽매이는지 돌아보게 된다.
출신이나 과거의 성공이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지금의 몸가짐이 나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깊은,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가여운 법이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자기 자신은 애처로운 법이란다.
왜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면서 묵직한 슬픔이 몰려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늘 나 자신을 가엽게 여기며 애처롭게 생각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도, 불의의 길을 걷는 사람도, 그들조차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어떤 선택을 했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결국 마음 깊은 곳엔 자신이 겪은 외로움과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슬픈 사연,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날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가여운 존재일지 모르겠다.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 당당한 척했지만, 아무도 없는 밤이면 맥주 한 캔 들이키며, 스스로를 원망하며 눈물 흘렸던 순간들이 헤아리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여이 여기는 그 마음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같다.
자신이 가여운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 또한 헤아릴 수 있다.
“분노하는 자에게 절대 분노로 맞서지 말라!”
화를 화로 갚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 악은 더 이상 퍼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을 마주한다.
때로는 억울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분노가 엉뚱하게도 나를 덮칠 때, 본능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맞서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것이 오랜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 아닐까?
하지만, 붓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게 되돌려준다고 해서, 네 마음이 정말 평화로워질까?”
분노를 분노로 되갚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악의 고리에 스스로를 묶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결코 쉽지는 않지만, 분노를 넘어서 평온을 선택하는 용기, 그리고 상대의 악을 증폭시키지 않고 멈출 수 있는 그런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옛말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화를 참는다고 해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 우리는 더 강해지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언뜻 보면 정의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세상에는 더 많은 눈먼 사람과 상처 입은 이들만 남게 만들 뿐이다.
그리운 것, 오래된 것을 쥐고 있지 말라고 하신다. 새로운 곳에 들뜨거나 눈을 반짝이지도 말란다. 사라져 가는 일체의 것을 아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도 말며, 슬퍼하거나 개탄하지도 말 것이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동요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리운 것, 오래된 것이라고 하면 빛바랜 사진부터 떠오른다. ‘디지털포메이션’을 외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바로 이 오래된 앨범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아이폰으로 찍어서, 내 아이패드로 옮기고, 디지털 앨범을 만들었다.
이렇게 아이패드에다 옮겨놓았더니, 그전에는 어디 박혀있는 지도 몰라서 먼지만 수북이 쌓이던 것이, 이제는 필요할 때 쉽게 찾을 수가 있게 됐다.
붓다는 이런 것도 붙잡고 있지 말라고 하시지만, 그래도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살아가니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한 번씩은 그리운 순간들을 만나고 싶다.
“당신은 왜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누구의 지시대로 살고 있는가? 부모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가? 혹은 세상 누군가의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삶이 과연 내 것이었나를 뒤돌아보란다. 당신 인생인데 왜 당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한다.
거울 속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해봐야겠다. 그리고 물어봐야겠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의 지시대로 살아왔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그동안의 내 삶이 과연 나 자신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영향 속에서 흔들린다.
부모님의 기대, 사회의 시선, 친구들과의 비교,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이상적인 삶의 모습, 어쩌면 우리는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나 자신한테 조용히 물어본다.
과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 길은 진정 나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남의 기대와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낸 모조품 같은 삶이었을까?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유영만 교수님이 ‘코나투스’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남의 카피로 살지 말고 원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나를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남의 흉내를 멈추고, 다소 늦은 감이 있어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며, 매 순간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나답게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노후라는 인생 2막에서는, 정말로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
“죽음이 곧 당신을 찾아온다”
들꽃을 따는 처녀를 순식간에 낚아채 가듯이, 잠든 마을을 순식간에 덮치는 홍수같이 죽음이 당신을 찾아온다고 한다.
인간의 죽음에는 정함이 없으므로, 장수할지, 단명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현명한 사람이건, 아둔한 사람이건 최후에는 누구나 죽음과 맞닥뜨린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새해가 되면서 한 살 더 먹어, 일흔두 살이 된 나는, 이런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전처럼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마치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내 마음을 후비고 들어온다. 삶이 정해진 길을 걸어가듯, 죽음 역시 우리의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더욱 현실처럼 다가온다.
죽음이라는 존재가 낯설고 두렵기도 하지만, 어쩌면 죽음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죽음을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공부를 해야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켜나간다면, 아마도 이 ‘죽음’이라는 친구도 그리 낯설 것 같지는 않다.
삶의 마지막이 언제 올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것이다.
어쩌면 죽음이 곧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하루하루를 더 충실히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일흔두 살, 나는 이제 죽음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대신, 나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 가고 싶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나의 삶이 후회로 가득 차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살고 싶다.
《 초역 붓다의 말 》
이 책의 구성은 흥미롭고 체계적이다.
저자는 불교 경전에서 직접 선택한
190개의 구절을
열두 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1부부터 12부까지
순서대로 배치했다.
각각의 구절과 주제는
독자의 마음을
차근차근 정화시키며
삶을 깊이 있게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이 책은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깨끗한 상태로 빚어가는 과정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마음의 길잡이다.
단순한 위로나 지침서가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며
삶의 본질과 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그런 책이 필요한 분들한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