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확실히 우리 집 양반이 변했다.
현빈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하얼빈”이 꼭 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는데, 웬일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가자고 한다.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따스함에, 가슴이 뭉클해져온다.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이렇게 극장에 와서 영화를 관람한 적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섯 손가락 안에도 안 드는 것 같다.
미국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극장을 찾아갔던 것이, “국제 시장”이었다. 마치 자기 인생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 낸 것 같다면서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싶어 해서 신기해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처음으로 극장을 간 것이 천만 돌파로 유명했던 “극한 직업”이었다. 우리 집 양반이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기억에 더 남는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이 ”서울의 봄“이었다.
오랫동안 천식을 앓았던 남편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행여 기침이라도 나오면 민폐를 끼칠까 봐, 그것이 겁나서 일부러 극장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얼빈”을 보러 극장으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영화 “하얼빈”은 개봉 전부터 이미 관심이 뜨거웠었다.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로 한국 현대사를 스릴러 장르로 풀어내면서 호평을 받은 우민호 감독은, 현실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유명한 분이시다.
이러한 우민호 감독님께서 현빈을 시작으로, 전여빈, 박정민, 조우진, 박훈, 유재명, 이동욱 같은 내놓으라는 연기파 배우들을 대거 출연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셨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나와 우리 집 양반을 놀라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은 배우가 한국 배우가 아니라, 일본에서도 대배우로 활약하고 계시는 “릴리 프랭키”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릴리 프랭키 님은 배우뿐만이 아니라,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이며,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계시는 일본의 대배우이다.
이렇게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배우가, 다른 역도 아닌,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하얼빈”과 같은 항일 감정을 담은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그의 결단은 단순히 연기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서로 과거를 마주하면서, 이런 역사적 이야기가 더 진정성 있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 같다.
당연히 한국 배우인 줄 알고, 영화를 보면서 있는 대로 미워했던 우리 집 양반도,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은 사람이 일본의 대배우였다는 사실을 나한테 전해 듣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그분의 용기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고는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단다. 이렇게라도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과의 아픈 상처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 하얗게 얼어붙은 산중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은 숨조차 쉴 수 없게 했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산속에서 터져 나오는 총성과 끔찍한 칼부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그 처절한 광경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손으로 총을 쥐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필사의 싸움을 이어갔던, 그런 독립군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래서인지, 현빈 배우님도 하얼빈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작품을 준비할 때부터 촬영이 끝날 때까지, 우리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독립운동가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계속 느끼면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얼빈” 영화 속에서의 현빈 배우님을 바라보면, 이 말이 진심이었음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군들의 하얼빈을 향해 떠나는 여정은 오로지 “늙은 늑대를 처단하라!“는 것이다.
조선을 철저히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일본 제국의 상징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히 조선의 땅에서 사라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우며, 하얼빈에서 늙은 늑대를 향한 결정적인 한 발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지들은 하나둘씩 위험에 처하고, 안중근은 스스로 고립된 길을 선택하며 모든 책임을 짊어진다.
안중근 의사의 결단과 신념은 인간적 두려움과 고뇌를 넘어서, 조국을 항한 사랑과 희생으로 승화된다.
완벽주의자로 소문이 자자한 현빈 배우님은, 이번 “하얼빈”을 촬영하면서도 절대 배역을 안 쓰고 그 힘든 모든 과정을 혼자서 직접 다 소화해 냈다고 한다
감독님이 이 장면은 발만 나오니까, 아니면 손만 나오니까 대역을 쓰자고 권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전부 다 본인이 직접 연기를 하신 것이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다.
본인의 죽음을 앞둔 하얼빈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대사가 이 영화를 더욱더 빛나게 한 것 같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지만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
하얼빈 / 이토 히로부미 대사
아마도 우민호 감독은,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권력과 권위를 해체시키면서, 그의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 국민만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성격을, 이토 히로부미가 제대로 해석을 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주변 사람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자기가 초대 통감으로 가면서 가마를 타고 갈 때, 왕이나 유생들은 겁나지가 않았는데, 이상하게 길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민초들의 눈빛이 되게 서늘하고 섬뜩하고, 깨름직스럽기까기 했다는 말을 자주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우민호 감독님께서 들으시고는 바로 영화 하얼빈에서 그 유명한 대사를 만들어 내신 것이다.
평소에는 서로 다투고 의견이 엇갈릴지라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들이다.
아무리 지도자가 자격이 없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나라가 위태롭다 싶으면 두 발 벗고 뛰어드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인 것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1997년 IMF, 언뜻 보기에 나라는 절망에 빠진 것 같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던 그때의 감동이 눈가를 적신다.
그 덕분에,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대한민국은 빠르게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또다시 똘똘 뭉쳐서 온 세계를 다시 한번 놀래켰었다.
12월 3일 그날 밤에, 국회로 난입하는 계엄군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우민호 감독님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으셨단다.
계엄군을 막는 시민들과 그 옛날 나라를 지키겠다는 독립군들이 오버랩이 되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에 가슴이 아프셨단다.
영화 하얼빈의 해외용 포스터에 보면, “ For a better Tomorrow”라고 쓰여있다.
현빈 배우님의 말씀처럼, 당연히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언젠가 또 이런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치게 되면, 그때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은 뜻을 모아서, 한 발 한 발 나가다 보면 더 좋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깊은 공감을 한다.
우민호 작가님한테 새해 소망 한 마디를 물었더니, 빨리 이 혼란이 안정화가 돼서 더 이상 우리 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추위에 안 떨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우민호 감독님만의 소망이 아닌, 온 국민의 바람이 아닐까 한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 하루빨리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하얼빈역에서 “대한국 만세”를 뜻하는 “까레아 우라”가 울려 퍼졌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의 외침이었다.
“까레아 우라~~ 까레아 우라~~”
목이 터져라고 저 하늘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치는 안중근 의사의 뒷모습에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하고 같이 울었다.
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조국의 이름을 부르며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는 절규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그 외치는 모습은 결코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희망이었고, 남은 사람들한테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까레아 우라~~ 까레아 우라~~”
수많은 관중들이 더 많이 더 멀리 뻗쳐나가서, 이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소리를 외친 것이다.
영화 하얼빈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감동스러운 장면이 나한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교수대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었다.
하얀 옷자락은 어두운 밤과 강렬하게 대비가 되면서 마치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상징하는 듯했다.
어머니와 처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비록 발걸음은 무거웠을 테지만, 표정만큼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슬프게 다가왔다.
어머니께서 그 옷을 지으실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아들의 품격과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셨을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한복 속에 담긴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느끼며, 교수대로 올라가는 안중근 의사의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했을까가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왜 우민호 감독이 영화 하얼빈의 안중근은 반드시 현빈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는지, 그 이유를 나는 이 장면에서 나름 알 것 같았다.
이 장면은 결코 글로만은 다 담을 수가 없다. 반드시 영화를 통해 봐야만 그 깊은 울림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현빈 배우님의 섬세한 연기와 우민호 감독의 탁월한 연출이 어우러진 이 장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감동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님의 편지
우리 집 양반은 1941년생이다.
어린 시절,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한단다. 그래서인지 이런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이야기나, 전쟁을 다룬, 그런 영화나 소설이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마음부터 달려간다.
영화 하얼빈을 보는 내내 남편의 눈빛은 깊은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영화 속에서 홀러 나오는 대사와 장면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내쉬는 한숨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공감의 표현인 것 같다.
우리 집 양반의 한숨 소리는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남편의 어깨에 남아있는 과거의 무게를 이제라도 덜어주고 싶다.
이 모두가 우리가 살아온 시간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남긴 소중한 흔적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