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 행복한 노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긍정 심리학의 선구자인 코리 키스 박사님의 저서, 《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가? 》에는, 흥미로운 개념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시들함 체크리스트”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기력하거나 재미없을 때 우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키스 박사는 이와는 조금 다른 상태를 ‘시들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시들함’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시들고, 삶이 무뎌지고, 감정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뜻한다. 딱히 슬프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다. 뭔가를 해도 재미가 없고, 사람을 만나도 감흥이 없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도 그게 싫다는 감정조차 희미한 것이 바로 ‘시들함’이다.
우울함은 감정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태라면, 시들함은 감정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 가까운 것이다.
우울은 고통이지만, 시들함은 공허라고 한다.
왠지 으시시하다.
꽃이 시들어가고, 나무가 죽어가는 모습이 연상이 된다.
우울증이나 번아웃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함이 감정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태라면, 시들함은 감정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 가깝단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키스 박사님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울함은 비교적 뚜렷한 고통으로 인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시들함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기 때문에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장기간 방치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영혼이 없는 듯한 공허함보다는, 그래도 고통스럽더라도 우울한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울은 그래도 “나 지금 힘들어”라고 투정이라도 부려볼 수 있지만, 시들함은 모든 감각의 전원을 꺼버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시들어버린다‘라는 말이 이렇게 섬뜩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키스 박사는 이런 시들함을 자가 진단해 볼 수 있도록 ‘시들함 체크리스트’를 제안한다.
️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뭔가 하고 있지만, 집중이 잘 안된다.
요즘 감동받은 기억이 없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피곤하게 느껴진다.
하루를 되돌아봤을 때 특별한 기억이 없다.
이런 항목 중 세 개 이상에 해당한다면, 이미 시들함의 늪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박사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살짝 반기를 들고 싶어진다.
요즘같이 정신없고 피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중에 세 개 미만만 해당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상황에 따라 5개 전부 해당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나는, 이미 시들어버린 화분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사람 같아서, 괜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내 마음의 상태를 다시 점검해 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덜 얄미워하기로 했디.
그렇다면 이 시들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루틴을 깬다
둘째, 감각을 깨운다
셋째, 감정을 표현한다
넷째, 의미를 찾아본다
첫째, 루틴을 깬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뇌가 지루함이라는 늪에 빠진다고 한다.
큰일이다.
난 일 년 365일, 거의 같은 시간에 아침을 먹고, 늘 우리 집 앞 단지에서, 똑같은 루트를 따라 걷는다.
이미 구제불능인 것일까?
문득 철학자 칸트가 떠오른다.
그는 매일 거의 동일한 시간에 기상하고 일정한 시간에 강의하며,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마을 사람들은 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칸트와 나의 차이점은, 그는 철학자이고, 나는 그냥 할매라는 것이다.
이것 빼고는 철학자와 나의 루틴은 너무도 닮았다.
그렇다면 칸트의 정신 상태는 어땠는지 궁금해진다.
시들함에서 벗어나려면 매일 산책 코스를 바꿔보거나, 가보지 않았던 카페에 가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변화가 자극이 된다고 한다.
나는 집돌이에, 삼식이인 남편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나의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줄는지…
둘째, 감각을 깨운다
좋은 음악을 듣거나,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거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활동이 뇌의 감각의 회로를 다시 작동시키게 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으니까.
노년의 문 턱을 넘어선 요즘, 나는 하루를 아주 다정하게 맞이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그 선율에 몸을 맡기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나의 근사한 서재에 조용히 앉는다.
진하게 퍼지는 커피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서재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저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이 고요하고 찬란한 순간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호사보다도 깊은 위로가 된다.
이곳에서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한 뼘 더 키워나간다.
그러고 나서, 아주 건강한 아침 식사를 남편과 맛있게 먹고 나서는, 제주도의 맑고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단지 내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
이보다 더 충만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키스 박사님의 두 번째 ‘시들함 탈출법’인 ‘감각을 깨워라’는 항목만큼은 자신 있게 통과다.
이미 내 일상은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순간들로 가득한 것 같다.
단지 하나, 너무 집에만 있다는 것 빼고는…
셋째, 감정을 표현한다.
오케이~~
이것도 무난하게 통과다.
나는 칠십 대에 접어든 지금도 예쁜 꽃을 보면, “와, 어쩜 이리도 예쁠까…”라고 쉬지 않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한 입 한 입을 천천히 음미하며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에 마냥 행복해한다.
심지어 누군가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기만 해도, 감사함을 마음속에 두고두고 새긴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내 단짝인 일기장에게 하소연을 하고, 가끔은 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감정들을 툭툭 터뜨려도 본다.
그리고 감정 표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남편한테도 종종 애교를 부린다.
“여보~~, 사랑해!”라고 말하면 대답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노력을 한다.
이 정도면 감정을 표현하라는 테스트에는 만점일 것 같다.
넷째, 의미를 찾아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는 어떻게 늙어가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코리 키스 박사님은 조언한다.
그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삶의 생기를 되찾는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라고 한다.
의미 있는 활동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빛을 되살리는 일인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웰빙”,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칠십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웰빙’보다는 ‘웰다잉’, 잘 떠나는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웰다잉’에 대해서 배우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에 대한 대답도 함께 따라온다.
잘 죽고 싶다.
편안하게 가고 싶다.
그저 노인으로 살다가 갈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고요하고 단정하게, 아름답게 삶을 접고 싶다는 마음, 이것이 나의 남은 인생의 최대 과제인 것 같다.
‘의미를 찾아본다’라는 네 번째 미션도 어느 정도 통과는 될 것 같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생기를 앗아가는 낯선 그림자가 바로 ‘시들함’인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그 시들함 속에서도 얼마든지 새로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코리 키스 박사님은 우리들한테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 한 곡, 따뜻한 커피 한 잔, 누군가에게 전하는 작은 인사 한마디가, 얼어붙은 감정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꽃이 시들었다고 해서,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조금만 햇살을 비추고, 물을 주고, 말을 걸어주면 언제든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처음 ‘시들함 체크리스트’를 들여다볼 땐, 어쩐지 다 내 이야기인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불안했다.
그런데 하나하나 ‘시들함 탈출법’을 정리해 보면서, 문득 알게 됐다.
나는 이미 그 시들함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단지 하나, 늘 집에만 있기를 고집하는 남편덕에, 루틴을 깨기가 힘들다는 것 빼고는, 무난하게 통과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숨 쉬듯, 보란 듯이 아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나의 노년엔 ‘공부’라는 든든한 친구가 있다.
시들해질 틈도 없이, 호기심 가득한 하루가 나를 끌고 간다.
조금 지루해질 만하면, 새로운 것이 툭 튀어나오고, 그걸 또 따라가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요즘엔 AI, 챗 gpt라는 신기한 친구까지 생겨서 말동무도 되고, 공부도 같이 해주니 시들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정말 고맙고 신기한 시대를 살고 있다.
시들지 말자.
시들기 전에 얼른 물도 주고, 마음의 영양도 넉넉히 챙기자.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햇살이 되고, 맑은 공기가 되자.
혼자 외롭게 시들게 두지 말자.
우리, 끝까지 환하게 피어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