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
또 한 편의 깊은 울림을 남긴 KBS 다큐멘터리를 봤다.
KBS 다큐는 늘 그렇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진심을 건져내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귀한 길을 조명해 준다.
그래서 나는 KBS 다큐를 사랑한다.
단순히 ‘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이번 다큐는 나 역시 힘겨운 이민자의 삶을 겪었던 사람이었기에, 더 깊은 공감과 울림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단지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치지 않고, 국민에게 감동으로 전해주는 KBS 다큐팀의 진심 어린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이런 분들이 계신 덕분에, 잊혀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시 살아 숨 쉬고,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오사카에 살고 계시는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한 많은 생애를 담아낸 KBS 다큐멘터리, “오사카 백세 인생”.
이 작품은 한일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특별히 기획된 방송이라고 한다.
세월의 뒤안길로 잊혀 가던 이야기들이 이렇게 다시 조명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렇게 의미 깊은 사연들을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더욱 고맙고 반갑다.
지금도 오사카에서 살고 계시는 할머니들 대부분은, 바로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난 분들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어린 시절은 일제 강점기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린 나이에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발걸음이 닿은 곳은,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인 낯선 땅, 일본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분들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길은 가까워서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국경은 가까웠더라도, 살아생전에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는 안타까움에 마음은 더 아팠을 것 같다.
재일교포 1세 할머니들의 일본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언어도, 문화도,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낯설고 차가웠을 것이다.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 않는 땅에서, 존재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삶이었다.
그 속에서도 할머니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일구어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닌, 살아야만 했던 생존의 길이었기에 그 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단했다.
공장에서, 시장에서, 혹은 바다에서, 할머니들은 땀과 눈물로 하루를 견뎠다.
고향을 기리는 마음은 깊어만 갔고, 조국을 잊지 않으려는 다짐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 멀고도 먼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굳센 삶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한 편의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어 다시 세상 밖으로 빛을 보게 한 것이다.
잊혀져가는 기억을 다시 붙잡아준 그 진심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 방송을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눈물겹도록 따뜻한 공간이 있다.
바로 ‘사랑방’이다.
‘사랑방’은. 오사카 재일 동포 고령자를 위한 주야간 보호시설이다.
사랑방은 단순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치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재일 동포 1세 할머니들은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리운 고향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은 거창하지 않아도, 그 안에는 오래된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누군가의 손맛으로 정성껏 만들어진 그 음식은, 단지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녹여주는 따뜻한 힘이 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들은 지난 세월, 말 못 할 고단함과 슬픔을 꺼내놓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어릴 적, 가족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건너왔던 기억부터 공장에서 흘린 피땀, 혹독한 차별 속에서 키워낸 아이들, 그리고 조국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까지 원 없이 털어놓는다.
그 모든 사연들이 사랑방 안에서는 존중받고, 함께 기억된다.
사랑방은 그들에게 단순한 복지 시설이 아니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견디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생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안심’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다.
젊은 날,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온 그분들에게, 사랑방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로서 환영받는 공간, 그리고 사람답게 늙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준다.
사랑방은 말한다.
“여기서만큼은 당신이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아왔든,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그 말 한마디가, 그 눈빛 하나가, 오랜 세월을 견뎌온 한 인생에게는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사랑방에서는 매일 따뜻한 한 끼가 차려진다.
직접 공수해 온 재료로 정성껏 만든 반찬은 고향의 맛을 되살리고, 익숙한 향기는 할머니들의 잃어버린 식욕마저 돌려놓는다.
“사랑방 밥이 제일 맛있다"라는 어느 할머니의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마음과 입이 함께 웃는 순간이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맛있는 음식까지 주는 사랑방은 좋은 곳이야~~”라고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진정으로 편안하고 따뜻해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식사 후에는 간단한 스트레칭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추억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인다.
다 같이 모여서 ‘아리랑’을 부르시는 모습에 괜히 또 눈물이 난다.
미국에서 살던 우리는 ‘한풀이’가 한국의 대중가요를 듣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트로트라는 말도 없었고, 오직 나훈아, 남진, 이미자의 노래만 있었다.
어렵게 구한 비디오테이프나 CD를 틀어놓고, 그리움에 사무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 댔던지..
아마 재일교포 1세 할머니들도 이런 마음으로 ‘아리랑’을 부르시는 것 같다.
그런 시간이 쌓여 할머니들의 마음에는 다시 ‘살아있음’이 피어나는 것이다.
한때 침묵하던 목소리는 노랫말로 되살아나고, 닫혀있던 마음은 웃음소리로 열리기 시작한다.
사랑방은 하루하루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물해 주는 곳이다.
시간이 나면, 한글 공부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시는 96세 강분도 할머니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진주 강씨라는 할머니 설명에, 진주 강씨는 양반이니까 절대로 이름 잊으면 안 된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눈물겹다.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릉밥”
할머니들이 조곤조곤 읊어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도대체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구수하고 정겨운 말인가.
그 옛날, 서당 훈장이 아무리 “하늘 천 따지 가물현에 누루황”이라고 가르쳐도, 해학과 지혜로 가득 찬 우리들의 학동들은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라고 따라 했단다.
사실, 하늘이 아무리 높고, 땅이 아무리 넓다 한들, 밥 다 먹고 난 뒤 가마솥 바닥에 노릇하게 눌어붙은 그 누룽지 한 숟갈만큼 감동 주는 게 또 있을까?
바삭바삭, 고소고소~~
그 한 숟갈에 담긴 건 단순한 밥이 아니라, 정겨운 삶의 맛이고, 세월의 향기인 것이다.
세월은 참 많이 흘렀고, 서당도, 훈장님도, 학동들도 이제는 전설처럼 들리지만, 그 정겨운 소리는 여전히 우리 기억 저편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그토록 어렵던 ‘하늘 천, 따 지’도, ‘가마솥에 누룽지’라는 따뜻한 기억 덕분에 이토록 오래, 이토록 유쾌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 지도에 대한 공부도 하신다.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함께 들여다보던 어느 날, 제주도에서 떠나셨다는 한 할머니께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무릉리라는 이름을 발견하셨다.
반가움에 눈이 동그래지시고, 손끝이 지도 위를 떨리듯 짚는다.
“여기, 바로 여기가 내 살던 곳이야~~”
곁에 있던 정귀미 대표님과 함께 그 작은 마을 이름을 확인하신 할머니의 표정은 그 순간만큼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기쁨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듯했다.
모슬포에서 배를 타셨단다.
그 당시에는 군함이 들어올 정도로 엄청나게 큰 항구였단다.
고향은 다녀가셨는지…
친지들은 아직도 모슬포에 남아계시는지…
조금이라도 건강이 허락될 때 한번이라도 다녀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살포시 해본다.
지금의 서귀포 모슬포가 얼마나 변했는지, 지금의 제주도가 얼마나 큰 섬이 됐는지, 지금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성장을 했는지, 다시 한번 보여드리고 싶다.
이제는 제주도가 더 이상, 그때의 가난하고 작았던 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이 공간은 2001년에 문을 열었다.
스무 살 때부터 간호사로 일을 하셨다는 정귀미 대표님은, 스물한 살 때 오빠가 재일교포 아이들한테 무용을 가르치라고 해서, 그때부터 쭉 자원봉사로 민족 강사 활동을 하셨단다.
간호학교에서 처음으로 한국 이름으로 이름표를 달고는,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의 문화를 공부하신 것이다.
정귀미 사랑방 대표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도 가슴에 와닿는다.
‘사랑방’은, 수십 년을 차별과 학대 속에서 살아오신 재일 교포 1세 분들의 고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곳이란다.
2000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요양 보험 제도가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금도 없었던 재일교포 1세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만 것이다.
그때 정귀미 대표님은, 1세 할머니들을 위한 삶의 보금자리는 우리가 직접 우리 손으로 만들자고 결심을 하셨단다.
드디어 2001년, 제도 밖으로 밀려났던 할머니들을 위해, 재일교포 2세, 3세들이 힘을 모아 20년 이상 비어있던 낡은 집을 빌려서 사랑방을 탄생시켰다.
거창한 시설도, 지원도 없었지만, 오로지 따뜻한 마음만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면서 많은 2세 3세 동포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사랑방 덕분에 대신 효도를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는 젊은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세워진 사랑방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랑을 짓고 있다.
사랑방은 할머니들에게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었다.
고립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고, 서로의 아픔을 달래가면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곳이 바로 ‘사랑방’이다.
‘사랑방’을 설립한 목적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고난과 차별, 역경 속에서 참고 견디며 살아온 그런 1세 재일교포 할머니들이, 맛있는 조선 반찬 먹고, 김치도 먹고, 조선인답게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단다.
재일교포 역시 한국 사람들이라서, 며느리 흉도 보고 싶고, 아들 자랑도 하고 싶지만, 마음 놓고 어디 가서 말 한마디 편하게 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사랑방에서 아무런 눈치도 안 보고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있어서, 사는 것이 마냥 즐겁다고 한다.
나라님도 안 볼 때는 흉을 보는데, 뒷담화도 가끔은 정신건강에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백세인생’노래를 할머니들께서 따라 부른다.
어려서 조국을 떠난 탓에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이 많기에, 노래 가사는 일본어로 표기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가사 하나하나에 손가락을 깊어가며, 그 옛날 놓쳐야만 했던 모국어의 멜로디를 이제서야 천천히, 마음 놓고 되짚어 나간다.
정귀미 대표께서, 노래를 가르치면서 늘 할머니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다.
이곳 사랑방에서 모든 것 다 쏟아내고,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를 하나하나 치유해 나가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당한 조선인의 모습으로 이곳에서 삶을 마무리하실 수 있기를 바란단다.
그 말에 할머니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 사랑방은 단지 노래를 부르는 장소가 아니다.
그토록 길고 깊었던 상처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치유의 공간인 것이다.
평생 감춰야 했던 자존감을 비로소 회복하는 존엄의 공간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숨길 필요도 없다.” 사랑방은 이렇게 말해준다.
아픈 역사도 품고, 서로의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것이 바로 사랑방이 남긴 가장 위대한 메시지다.
난 처음에 방송을 들으면서 ‘엄마~~‘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정말 친딸인 줄 알았다.
모두한테 엄마, 엄마 하면서 진심으로 따뜻하게 봉사하시는 정귀미 대표님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할머니들을 향해 “엄마”라고 부르는 그 따뜻한 호칭 안에는, 혈연을 뛰어넘는 사랑과 존중이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눈빛 하나에서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모습은 단지 돌봄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나와 우리 집 양반의 머지않은 미래가 겹쳐졌다.
그래서일까,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 한켠이 먹먹하고 어쩐지 불안함도 스며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우리나라의 요양 시설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좋은 시설에서 훌륭한 대우를 받는다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 같은 평범한 서민들이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은 과연 몇 군데나 될지, 그런 생각에 마음이 자꾸 무거워진다.
“사랑방”처럼, 돈 한 푼 안 내고도 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봐주는 곳이 과연 또 있을까?
간절히 바래본다.
누구든, 어떤 형편이든 노년의 시간이 외롭지 않고, 존엄을 잃지 않는 공간에서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런 사회를, 그런 세상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정귀미 대표님의 “엄마”라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본인도 케어를 받으셔야 할 할머니께서, 같이 생활하고 계시는 다른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신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사고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정신을 놓으셨단다.
그래도 그 할머니보다는 내가 조금은 낫다는 생각에, 기운 없어 보이는 다른 할머니한테, 여기 살짝 기대면 조금 더 편하다고, 일부러 베개까지 갖다주시는 모습에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받기만 해도 괜찮을 나이에, 그 다정한 할머니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그것이 물질이 아니어도, 작은 관심, 다정한 손길, 따뜻한 눈빛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욕심을 살짝 부려본다.
언젠가 나도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렇게 늘 배려를 받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나보다 힘든 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늘이 도우신다면…
‘사랑방’이라는 말처럼, 거주하지는 않아도 가끔 놀러 오시는 분들도 많다.
이곳에 오면 웃을 일이 생긴다는 말씀에, ‘사랑방’의 존재가 더 크게 다가온다.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노망 난다"라는 한 할머니의 말씀에 그냥 빵 터졌다.
늘 집에만 있으려는 우리 집 양반 때문에, 노망날까 두렵다.
사랑방 밥이 제일 맛있어서 일부러 밥을 먹으러 온다는 할머니들의 말씀에, 김치도 일부로 한국에서 가져온다고 설명을 해 주신다.
물론 일본에서도 김치를 만들기도 하고, 팔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원산지에서 만든 것이 제일 맛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일본 내에서도 한국 김치의 위상이 높아져서, 슈퍼에서도 팔고,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매를 할 수가 있단다.
그전에는 한국인에 대한 비하가 심해서, 조센징한테는 마늘 냄새가 역겹게 난다고 피해 다녔던 적이 있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람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오죽하면 한국 음식만 주로 해먹는 한인들이 살던 집은, 같은 교포가 아니면 팔기가 힘들 정도였다.
냄새 때문이었다.
특히 청국장을 자주 끓여먹는 집은 아예 집 파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K-푸드가 유행을 하면서 그 콧대 높았던 미국 마트에서 까지도, 한국 음식이랑 김치를 팔고 있다.
이래서 나라가 잘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몰래 숨어서 먹다시피 한 한국 음식을, 이제는 가슴 펴고 당당히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는 더 이상, 코리안이라고, 조센징이라고 멸시받을 일은 없다.
아무리 개인이 똑똑하고 잘 살아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갖게 된 것이다.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역시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일본에서 살았어도, 결코 일본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먹는 것도 한국 음식이 가장 맛있고, 사람을 만나도 같은 조선 사람을 만나야 마음이 놓이고 행복한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한국과 가까워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가 있어서 미국보다는 나을 것 같다.
아직도 미국에 사는 많은 한인들이, 비행기표를 살 여유가 없어서 못 나오고 있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다.
고국에 나가 보겠다고 일을 쉴 수도 없는 형편이다 보니,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못 나오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내 나라가 그립고, 고향이 그리워서, 한인 타운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내 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 또한 헤아려줬으면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자꾸만 지난 내 인생을 떠올리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완전히 다른 낯선 문화 속에서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나의 초창기의 미국 이민생활처럼, 그분들 역시 일본 땅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언어도 문화도 사람들의 시선조차도 따갑기만 했던 그 시절, 나는 매일 밤 이불 속에서 울음을 삼키며 “나는 왜 여기 있나”를 스트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 고단한 시간이 내게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공장 일터에서, 혹은 찬 바닷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위해 버텨냈던 그 삶의 흔적들.
나 역시 공장에서, 혹은 식당에서 청소용 장갑을 끼고 차가운 새벽을 시작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들이 겪은 차별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살아낸 삶이 나의 이야기처럼 마음에 깊이 스며든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이방인’이었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며 ‘사람답게’ 살고자 버텨온 존재들이었다.
이제 나는 고국으로 돌아와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에는 여전히 그 이민자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굳센 발걸음과 어딘가 닮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삶의 흔적은 이렇게 겹쳐지고 닮아가는 것 같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나의 지난 생도 다시금 소중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