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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 가을의 밤공기가 차오르면, 진주 남강 위로 수만 개의 등불이 떠오른다.
붉고 황홀한 유등들이 떠올라 밤하늘의 별보다도 찬란한 불빛을 만든다.
진주 남강유등축제!
이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이 축제의 시작은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가족에게 무사함을 전하고자 강 위에 등불을 띄웠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유등축제의 유래라고 한다.
진주 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의기 (義妓) 논개와 7만 명의 순국 영령을 기리는 빛의 제사다.
시간이 흐르고,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날 밤 남강을 밝히던 불빛은 평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소망의 불빛이 다시금 강 위로 흐른다.
진주성의 돌담길부터 남강의 수면까지, 수많은 손끝에서 피어난 등불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남강유등축제는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을의 축제가 되었다.
10월 초,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큰딸과 작은딸이 나란히 제주를 찾았다가 진주에 사는 사촌 언니와 형부를 만나기 위해 모처럼 진주 나들이에 나섰다.
그런데 마치 하늘이 우리를 위해 시기를 맞춰준 듯, 그날은 바로 진주 남강유등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 그토록 마음에 품었던 남강의 불빛을 이제서야 미국의 두 딸과 함께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강 위로 흐르는 수만 개의 등불이 반짝이며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우리를 반겨주었다.
진주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조카 내외 덕분에 이 축제를 누구보다 더 깊이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교수님이신 조카사위는 진주성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남강의 유래, 논개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열정적으로, 마치 현장 해설사처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 덕분에 딸들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역사 속 시간 여행을 하는 듯 몰입했다.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이고, 심지어 번역기까지 동원된 활기찬 대화 속에서도 알래스카 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켠이 뭉클했다.
비록 미국 땅에서 살아가지만, 그 뿌리만큼은 여전히 한국에 깊이 닿아 있음을 느꼈다.
작은 딸은, 이번 여행에서 한국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자기 큰 딸을 한국에 유학 보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한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와 정신을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단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집 양반이 늘 하던 말이 있다.
손녀 중 하나 만이라도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인 다운 정서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남편의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지려나 보다.
강 위의 불꽃처럼, 세대를 넘어 흐르는 인연이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고 있었다.
진주의 남강은 그날 밤, 단지 등불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뿌리와 사랑까지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남강 위로 떠오른 불빛 조형물들 사이에서, 한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갓을 쓴 선비가 피아노 앞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과, 북을 두드리는 악사, 그리고 관객처럼 서 있는 선비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마치 “조선판 재즈 페스티벌"이라도 여는 듯하다.
고풍스러운 한복 차림에 피아노라니…
시대를 뛰어넘은 이 조합이 어찌나 유쾌하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불빛에 물든 남강의 물결이 피아노 선율처럼 흔들리고, 그 빛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장난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진주의 밤이 이토록 낭만적이고, 또 유쾌하다는 사실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남강 위에 반짝이는 유등들이 마치 별빛처럼 물결 위에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불빛들이 강물에 길게 드리워져, 흐르는 물이 아니라 빛이 흐르는 강처럼 보였다.
붉은빛, 푸른빛, 노란빛이 한데 어우러져 진주의 밤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등불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있고, 그 마음들이 모여 남강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특히 가운데 서 있는 푸른 치마의 여인은 마치 남강의 수호신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 사진 속의 부교(浮橋)는 진주 남강유등축제의 상징적인 길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다리라고 한다.
축제 기간에만 특별히 설치되었다가, 축제가 끝나면 흔적 없이 철거되는 이 다리는 짧은 생명력을 지녔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것이다.
밤하늘 아래 불빛이 반짝이고, 붉고 푸른 등들이 줄지어 남강 위에 떠 있다.
그 위를 걷는 우리 가족들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다리 건너는 데 2천 원, 65세 이상은 천 원이라는 작은 비용이지만 그 길을 걸을 때의 감동은 값으로 매길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걷는 동안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선시대로 돌아가, 등불을 들고 강을 건너던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느끼면서 걸었다.
이 부교가 아니면 강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불빛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된다.
손을 잡은 연인들, 애들 손을 꼭 잡고 가족과 함께 걷는 사람들, 모두의 발걸음이 가볍고 행복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을수록 마음이 환해진다.
역사의 숨결과 사람들의 소망이 불빛으로 피어나는 진주의 부교는, 그래서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기억 속을 건너는 길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참 멋있다.
아마도 성을 지키며 남강을 건너려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수문병인 것 같다.
남강의 물결 위로 반짝이는 등불 속에서, 진주성의 용기와 희생, 그리고 조선의 기개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머리 위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매달린 수천 개의 등이 한꺼번에 불을 밝히자, 세상이 온통 붉고 푸른빛으로 물들은 것 같다.
등 하나의 가격이 만 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단순한 전구 불빛이 아니라,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하나씩 담겨 있다.
건강을 비는 사람, 사랑을 바라는 사람, 합격을 기원하는 학생까지…
이 수많은 불빛들이 모여 거대한 마음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이 긴 등 터널을 걸으면서 나는 잠시 말없이 등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에도 하나쯤 등을 달아보고 싶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은은한 조명이 성벽을 물들이며, 그 위에 우뚝 선 촉석루가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성벽 아래로는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이 잔잔히 흐른다.
그 강물은 수백 년 전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의로움과 희생의 이야기를 지금도 전하고 있는 듯하다.
등불이 물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마치 논개의 혼이 그 빛 속에서 미소 짓는 듯 느껴진다.
진주성의 밤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그곳엔 역사의 숨결과 인간의 존엄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논개의 결연한 결심, 백성들의 절규, 그리고 남강의 물결이 만들어낸 이 풍경은 화려한 불빛보다도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촛불처럼 성벽을 비추는 조명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기억의 불빛이다.
진주성의 밤은 그래서 더욱 찬란한 것 같다.
그곳에는 단지 성과 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기 논개의 용기와 나라를 향한 사랑이 영원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1593년, 임진왜란의 불길이 한반도를 뒤덮던 시절, 그 격랑 속에서도 진주는 꺾이지 않는 성이었다.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이고, 곡창지대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였다.
이러한 진주성은 바로 나라의 심장이었고, 그곳을 지키는 일은 곧 조선을 지키는 일이었다.
김시민 장군과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맞섰다.
돌멩이 하나라도 무기로 삼고, 불길 속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남강의 물결은 피로 물들었고, 성벽 위의 연기는 하늘을 덮었지만, 그들은 끝내 1차 진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패배한 왜군은 다시 칼을 갈고, 병사를 모아 더 거세고 잔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2차 진주대첩이었다.
성 안의 의병과 군사, 백성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지만 수십 배로 몰려든 왜군의 힘을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진주는 불길에 휩싸였고, 비명과 연기가 뒤엉킨 그날의 밤은 조선의 한이 되어 남았다.
그 잿더미 속, 촉석루 위에서는 패전의 슬픔 대신 승전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왜군의 장수들이 잔치를 벌이며 조선의 백성을 조롱하듯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아래 절벽, 남강을 내려다보는 가파른 바위 위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논개.
곱게 단장한 그녀는 마치 꽃처럼 고왔다.
왜장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는 순간, 논개는 그 왜장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남강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혹여라도 원수를 놓칠까 두려워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워 사로잡은 팔이 절대 떨어지지 않게 했다.
의기 (義妓) 논개는 그렇게 조국을 위해, 정의를 위해, 이름 없는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진주 남강유등축제가 열리는 곳의 다리를 올려다보던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울림이 밀려왔다.
조카사위 교수님의 열정 어린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다리 아래 반짝이는 황금빛 고리들을 바라보았다.
그저 장식인 줄만 알았던 그것들이 논개의 열 손가락 반지를 형상화한 상징물이라는 사실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논개가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질 때, 혹여라도 손이 풀릴까 두려워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웠다는 그 결의와 용기가 저 다리 속에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만약 조카사위의 세심한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아름다운 조명 아래, 다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이 다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의로움과 희생의 기억을 품은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함께 여행하던 알래스카의 두 딸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면서 너무도 감동스러워했다.
게다가 진주 조카는 자신이 아끼던 은가락지를 아낌없이 사촌 동생들한테 하나씩 건넸다.
진주의 상징이라면서,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고마웠다.
은빛 고리 하나에 깃든 따뜻한 마음, 가락지를 손에 쥔 순간, 그건 단순한 장식구가 아니라 역사와 마음이 담긴 선물이 되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다.
불현듯, 아주 오래전 교토 근처에서 보았던 “귀무덤(耳塚)”이 떠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의 귀를 베었다는 그 참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곳에 서 있었을 때, 나는 숨이 막히고, 말문이 닫혔다.
살아남은 후손으로서 느껴야 할 부끄러움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번 진주 여행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진 한 여인의 결의가, 그 어두운 역사를 뚫고 오늘의 우리에게 묵묵히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죄는 용서하되, 역사는 잊지 말라.”
이 말이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용서는 인간의 품격이지만, 망각은 다시 같은 아픔을 부르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논개의 희생은 단순히 한 사람의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의로움과 나라 사랑의 혼이 세대를 넘어 이어진 상징이다.
나는 그 물결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비록 시대는 달라졌지만, 진실과 정의를 향한 그 마음만큼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의로움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되는 한, 언제나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