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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workplace)이 갖는 사회적 역할 세 가지!

by 개미와 베짱이 Mar 17. 2025

직장은 사람들이 각자 경력(career)을 혼자 또는 협업으로 일하는 곳으로 ‘일터(workplace)’라고도 한다. 직장은 직업과 더불어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본주의 3대 요소인 ‘노동, 토지, 자본’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직장은 개인이 생산 활동하는 곳이자, 그 결과물이 ‘자산’으로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장은 대외적으로 자신을 들어내는 간판이자 아바타로서 애지중지 여긴다.      


일반적으로 직장의 의미는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금전보상을 받는 곳, 즉 생계를 꾸려 나가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 단순히 근로 제공과 돈으로 보상하는 관계로만 맺어져 있을까? 법에서 정한 1일 8시간 근로는 수면시간(8시간)을 제외한 활동 시간의 상당 부분을 직장에서 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삶의 약 7할 정도를 직장에서 소비 또는 투자한다는 것으로서 단순히 근로와 금전보상의 맞교환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직장이 왜 사회 구성 요소로 꼽히는지 어렴풋이 짐작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직장은 사회 축소판으로 다양한 일들이 발생하고 공존하며 소멸의 과정을 무한 반복하는 곳이다. 아울러 사람의 집합체로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직장 내 갈등이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사회문제가 될 뿐 아니라, 사회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만큼 직장의 일상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수이다. 직장생활이 재미있어야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질 뿐 아니라 신명나는 일터로 거듭난다. 취준생이 찾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일터의 관계가 원만해야 각자의 삶이 매끄러워진다. 하루하루 직장생활이 더해 가면서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스스로 삶에 보람을 느낀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후회 없는 삶은 어떻게 이뤄질까? 단순히 열심히 일만 한다고 가능할까? 어떤 조건이 더 충족되어야 할까? 직장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뭘까? 그 질문에 대답은 ‘채움터(reward)’, ‘배움터(learning)’, ‘놀이터(fun)’ 세 가지이다.      


첫째, ‘채움터’이다. 채움터는 곧 보상(reward)을 전제로 한다. 왜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일반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답을 한다. 바로 경제적 채움이다. 근로 대가(對價)인 금전 보상을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직장을 다니는 것이다. 형식학습이 마무리될 때쯤 젊은이들은 대부분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굳이 힘든 직장생활을 왜 하려고 할까? 젊음을 만끽하면서 즐겨도 되는데 말이다. 힘든 길을 가는 이유는 바로 ‘돈’이다.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것을 누릴 수 있다. 돈은 단순히 교환만의 목적은 아니다.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척도이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직장인의 바람 중 하나이다. 세상에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로 살아가는 사람도 돈이 있어야 한다. 도심 생활보다는 훨씬 적은 규모의 경제적 자원이겠지만 생필품과 같은 물질적 수요가 있기에 돈은 필요하다. 그 결과 학교 졸업함과 동시에 직장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도 연봉이 높은 곳을 찾아서 말이다.      


구직에 나선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기업 그룹사는 ‘삼성’이다. 그 이유는 ‘만족스러운 급여와 보상제도(44.8%)’로 삼성을 선택한 이유이다(인쿠르트, 2025). 높은 금전보상은 구직자들이 회사를 선택하는 가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부유함은 ‘행복촉진제’는 아니지만 ‘불안완화제’이자 ‘고통진정제’임에는 틀림없다. 속물이라고 비아냥할 수도 있지만, 사회는 도덕적 시각으로 바라볼 만큼 녹록치 않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하는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보상 받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그 바람이 늘 허전함으로 채워지기에 가슴 한 켠에 ‘사직서’를 품고 출근할 뿐 아니라, 노사 갈등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둘째, ‘배움터’이다. 논어의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이다. 평생교육시대이다. 배움은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 배움터이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의지만 있다면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의미한다. 평생교육시대임을 공자는 이미 간파한 것일까? 그 중 직장도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학습 공간이다. 직장은 시간이 흐르면 경력이 쌓이는 단순한 곳이 아니다.      


일터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람과 일로 구성된 직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타래처럼 얽혀져 있다. 그 실타래가 어떤 이에게는 ‘사내정치’라는 오명으로 남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과 공평, 그리고 객관적 평가로 정당한 보상을 받는 연결고리일 수 있다. 외줄타기와도 같은 것이 직장생활이다. 외줄타기는 잘 배워야 한다. 잘못 배우면 직장내에서 매장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 관계는 자신의 가치관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가치관은 어떻게 살아 왔느냐를 가늠하는 척도라면, 관계는 직장에서 어떻게 배우고 익혔는지를 알 수 있는 포인트이다. 김치는 시간이 흐르면 숙성되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노련해진다. 많은 경험으로 익숙하고 능란하다는 의미의 ‘노련’은 긍정적 의미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착함과 악함을 동시에 갖는 ‘지킬 앤 하이드’와 같다. 그것 또한 오랜 시간 부침을 거듭하면서 직장에서 배운 결과이다. 신입사원이 조기퇴사하는 이유 중 두 번째가 ‘상사․동료와의 갈등’이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 어디든지 존재하는 갈등이다.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피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갈등유발자’가 될 수도 있고 ‘갈등조절자’로 지낼 수도 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언행의 강도와 표현이 달라야 한다. 페르소나처럼 말이다. ‘눈높이 맞춤형 관계’를 익혀야 한다.     


일도 마찬가지이다. ‘일하면서 배운다’는 것은 시계 초침이 흘러가면 자동으로 몸에 배이는 것이 아니다. 일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하던 것일 수도 있고, 새롭게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값비싼 경험이다. 경험이 주는 인사이트(insgiht)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연륜’이라고 부른다. 다만, 기계적으로 수동적으로 일을 대한다면 일하는 과정에서 겪는 아픔만큼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틈새로 모두 새어 나간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 된다. 배움의 시간과 노력이 투자가 아니라 소비가 된다. 일하면서 배우는 것에서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 ‘원칙’이다. 일은 ‘옳고 그름’의 준법이 기준이다. 규칙에 위반되거나 사회 도덕적 기준에 위배되는 일은 하면 안된다. 그래서 원칙과 기준을 학습해야 한다. 신입사원은 기업주도로 사회적 법규와 기업내 사규를 학습한다. 습관이 될 만큼 익혀야 하는 영역이다.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고, 직장생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원칙이나 기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天地差異)이다.      


둘, ‘부족함’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무엇(what)’과 ‘어떻게(how)’를 구체화하는 단계이다. 직무 수행과정에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말이다. 인간은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 관대한 편이다. 확증편향적 감성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고 들으면서 잘못된 것은 ‘내 탓’이 아닌 ‘남 탓’하기가 일수이다. 그러면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다. 변명으로 점철된 직장생활로 얼룩질 수 있다. 1인칭에 대한 관대함을 3인칭의 냉철함으로 바라 볼 때 ‘부족함’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빈 틈이 무엇인지 파악되었다면, 어떻게 빈 공간을 채울 것인지 설계해야 한다. 전문가에게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다양한 강좌를 통해 학습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역량이 쓰임새가 있도록 키워야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역량 육성은 주체가 바뀌었다. ‘기업주도형’에서 ‘자기주도형’으로 말이다.     


셋, ‘경험’이다. 일상은 학습교재이다. 경험에서 얻은 인사이트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그 만큼 영향력이 크다. 글 쓰는 이 순간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스스로 성장할 수도 있고 안주(安住)할 수도 있다. 일터는 자신의 삶 일부라고 강조했다. 아니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근무시간에만 얽혀 있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시간이 사람과 일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워라밸’이 수면 위로 올라온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상황이 매뉴얼처럼 발생할 수도 없지만, 문제해결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례를 흘러 보낼 것이 아니라, 학습교재로 활용할 때 배움의 갈증은 해소된다. 매사 성공으로 마무리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새로움에 도전장을 내밀 때에는 절반 이상 실패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실패를 걸림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는 디딤돌로 바꿀 때 경험은 도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마중물이 된다.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의 깨달음 결과이다. 경험은 한 단계 어른스러워지는 성장촉진제와 같다. 경험은 주변에 널려 있다. 당연함으로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학습교재가 아니다. 궁금증으로 바라보고 고민하는 순간 도움이 된다. 그래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셋째, ‘놀이터’이다.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명언을 남겼다. 즐기지 않으면 ‘일 중독자(workholic)’ 또는 ‘돈 버는 기계’의 흑역사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할 때 자신의 역사는 후회 없는 삶이 된다. 직장은 비즈니스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재미가 곁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로봇과 다를 바 없다. 너무 삭막하다. 냉랭한 공기에 찬바람만 쌩쌩 분다. 그 곳이 과연 ‘신바람 나는 일터’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까? 취준생들이 찾는 기업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통제(control)가 기피 대상 1순위이다. 인사분야(human resources)에서도 혐오하는 단어이다. 통제는 숨통을 죄어 온다. 통제는 동질성과 획일성을 강요한다. 통제는 ‘재미(fun)’와 ‘자율(autonomy)’보다 ‘구속(confinement)’이 더 잘 어울린다. 재미(fun)를 곁들인 놀이와는 거리가 멀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지원(support)’이 어울리는 시대이다. ‘3M의 15%룰’과 ‘홀마크의 30%룰’이 대표적 사례이다. 창조적 연구에 사용하거나 재충전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을 회사가 공식적으로 할애한 것이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위해 자율성을 보장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빈틈없이 잘 짜여진 시간표도 중요하지만, 일탈할 수 있는 기회 또한 공존한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재미에서 미래 먹거리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도 있다. ‘놀이터’는 다른 두 가지 보다 기업도 개인도 모두 철저하게 준수해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채움터’, ‘배움터’, ‘놀이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일상을 ‘조직문화’라고 부른다, 조직문화는  색깔로 표현할 수도 있다. 어떤 기업은 검은색으로, 어떤 회사는 빨간색으로 말이다. 그 색깔이 퇴사 이유가 된다면 믿겠는가? 1년도 안된 신입사원 퇴사율이 10명 중 4명을 넘어섰다. 그 중 으뜸이 ‘조직적응 실패’이다. 거의 50%를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것이 바로 조직문화가 시대 트렌드에 뒤쳐졌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금전보상도 예외는 아니다. 워라밸과 같은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퇴직한다는 이유도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2020년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는 직장생활에 큰 변화를 준 변곡점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유연근무제, 화상회의, 공정한 평가와 보상, 연령을 파괴한 수평적 문화 등 인사를 포함한 조직문화가 한 순간에 변했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말이다. 숱한 시간을 바꾸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이라고 여겼던 기득권의 조직문화가 하루아침에 변한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직장이 갖는 사회적 기능 세 가지는 조직문화 진단에도 유용하게 활용된다는 점에서 유의있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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