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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한범 Jan 17. 2020

봉주르, 바게트국의 인기남.

그린피스 항해사 썰 #19

 우리는 그 거친 파도를 뚫고 드디어 프랑스의 작은 해변 마을, '라로셸'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우리를 처음으로 맞이해주는 것은 좁디좁은 항구의 입구, 갑문이었다. 우리 배의 폭은 14.3미터이고, 이 갑문의 폭은 겨우 14.7미터였다. 이 좁은 폭으로 길이 72미터인 우리 배가 통과해야 되었다.

라로셰 항의 입구

 사소한 고장하나, 의사소통 실수하나 가 12세기부터 유지되어온 항구의 입구를 박살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혹은 우리 배가 부서지거나...)

 어쨌든 우리는 입항을 해야 했고, 충분한 회의와 계획을 세운 뒤, 항구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승선을 하면서, 선장님들이 좁은 곳에서 조종을 하는 것을 보면, '예술행위'를 하는 것 같다.

 바람, 조류, 파도와 같은 각종 방해 요소들을 계산하고 느끼며, 손끝으로 조작하는 엔진과 타의 힘, 각 위치에 배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로 유유히 좁은 길목을 빠져나가는 선장은 흡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마에스트로 같다.

 선장을 뜻하는 '마스터'의 이탈리아어가 '마에스트로'인 것은 과연 우연이 아니다.

한 걸음 정도 되는 간격을 두고 통과하는 우리 배

 그렇게 우리는 힘겹게 좁은 입구를 통과하고, 좁은 항구에서 겨우겨우 정박을 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우리 배를 맞이해 주는 라로셸의 시민들이 '대환영'을 해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배 실내를 구경하는 '오픈보트'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침내 입항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 만으로 박수를 받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우리 배와 선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

 그렇게 우리의 '오픈보트'행사는 시작되었고, 나는 내가 일하는 곳, 배를 조종하는 '선교(브릿지)' 에서의 설명을 맡게 되었다.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이 찍혔다.

 처음에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막막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던 항해장비들, "이것은 레이다이고, 이것은 해도입니다. 이건 이렇게 이렇게 사용합니다."부터 시작해서, 나의 짧았던 그린피스에서의 경험들을 조금씩 말을 하니, 방문한 시민들은 굉장히 흥미를 보였다. 좋은 반응의 관객들 덕분에, 나는 더욱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시민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한 가지 느꼈다.

"Sailor(뱃사람)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한국에서 나를 항해사라고 소개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보통 셋 중에 하나이다.

 1. 우와~ 고기 얼마나 잡아요?

 2. 나도 울릉도 갈 때 캬~ 배 탔었는데, 멀미가 장난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버텨요? 아이고... 나는 배는 못 타겠더라.

 3. 우와 그러면 침 잘 놓겠네요. 아, 한의사가 아니라 항해사요?

 

 또, 하나의 열등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의 뱃사람의 의미는 그렇게 좋지 않다. '뱃놈', 거친일을 하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항해사나 기관사들도 자기 비하의 농담으로 본인을 '지게꾼' 혹은 '기름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달랐다.

 뱃사람, Sailor들을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듯했다. 따라서 질문하는 것도 많이 달랐다.

"항해사들은 어떻게 일을 하나?"

"이 배는 한번 출항해서 몇 마일 정도 갈 수 있나?"

"가장 기억에 남는 항구는?"등등... Sailor들의 삶에 어느 정도 이해도가 깔려있는 바탕에서 질문을 해 주었다.


 물론 유럽 사람들, 특히 서유럽 국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항해시대'에 선박을 이용한 각종 침략과 수탈로,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세계 권력을 가져다준 특별한 시기였기에, 거기에 대한 역사를 배우고, 그 배경을 바탕으로 배에 대한 다른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해사인 입장에서는 매우 부러운 항해 문화이기도 하였다.

귀여운 어린이에게 받은 그림선물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민들과, 또 각종 기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때로는 그림선물도 받고, 감사편지도 받았으며, 프랑스 신문에 자그마하게 (잘못된) 이름이 실리기도 하였다.

프랑스 한 신문에 실렸지만, 2등항해사 '한범'이 아닌 'Amboon'이 된 나.

 그리고 그 행사가 끝나고, 눈이 오는 어느 날 나의 교대자가 왔다. 나는 인수인계를 하고 나서, 부랴부랴 짐을 싼 뒤, 그린피스에서의 두 번째 휴가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본 글의 내용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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