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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Dec 04. 2023

필사의 힘 - 현대시 만나기

  고3 담임 교사를 하다보면 수시 원서 접수가 끝나는 9월 중순부터 급격하게 여유 시간이 늘어난다. 교사들 중에는 가을부터 이어지는 여유 시간 때문에 고3 담임만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평범한 일반고는 정시보다 수시 지원 비율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9월 중순 수시 원서 접수 마감과 함께 1년 농사를 다 지었다고 보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니다. 

  2013년부터 작년 한 해를 제외하고 고3 담임과 학년 부장 교사를 담당했던 나는 초기에는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낼 때가 많았다. 보통 그 해 입시 지도를 돌아보며 복기하는 과정을 거치거나 이 책 저 책을 기웃대는 정도로 소일거리를 삼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현대 문학 중 현대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걸 왜 시작했는지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1,000편 정도를 목표로 무작정 시를 베껴 썼던 것 같다. 거창한 이유가 있거나,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어떤 시를 옮겨 적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책상 한 켠에 쌓여 있는 현대시 종합 해설서가 해결해 주었다. 요즘은 교사들에게 잘 배부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출판사가 수백 편의 문학 작품들을 모으고 해설을 덧붙인 해설서를 자꾸만 가져다 주었다. 몇 종류의 해설서 중에 표지가 가장 예쁜 해설서를 골라 첫 작품부터 아무 생각없이 필사를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던 현대시 필사는 해를 거듭하면서도 이어졌다. 몇 권의 노트가 쌓였다. 해설서도 한 권이 다 끝나면 다음 해설서를 펼쳤다. 대부분의 작품이 중복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두 번째 해설서의 모든 시를 옮겨 적었다. 짧은 시, 긴 서사시, 현대 시조 등 장르를 불문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나갔다. 

  그렇게 필사한 작품의 수가 1,000편이 넘어가고 햇수로는 5년 정도 지났을 때 문득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는 EBS 수능 특강이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현대시 중에 내가 모르는 시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 물론 출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을 섞어서 출제하기에 늘 처음보는 시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이미 접해본 시들이 출제되기 시작했다. 

  두번째 변화는 처음 보는 시를 읽어나갈 수 있는 이해력의 상승이었다. 국어 교사로서 많은 문학 작품들을 읽고 공부해 왔지만 언제나 작가의 의도대로 압축된 현대시는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시를 옮겨 쓴 경험이 쌓이자, 처음 보는 현대시에서 작가의 의도나 핵심 내용을 추출해 내는데 어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000편이 넘는 시를 필사하며 그 시가 어떤 내용인지 해석하지 않았다. 그저 옮겨 적었고 옮겨 적다보면 어떤 시는 아름다웠고, 어떤 시는 덜그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좋은 시는 옮겨 적고 나서 한두 번씩 읊조려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를 만났고 시가 나의 역량을 키워주었고,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직도 서점에서 시집을 사거나, 처음 보는 작가의 시집을 뒤적이며 시를 음미하진 못한다. 시도 시 나름이라서 모든 시가 최소한의 작품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들도 많다. 그러나 국어 교사로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시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시라는 형식을 빌어 어떤 마음을 드러냈는지 궁금할 줄 알게 되었다. 

  혹시나 영상 플랫폼들의 자극적인 짧은 영상에 지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시를 한 번 옮겨 적어 보는 건 어떨까? 



  * 덧붙이는 말 : 국어 교사이자 입시 강사로서도 시 필사를 권하는 편이다. 모의고사와 수능 국어에는 언제나 모르는 문학 작품이 출제된다. 현대시의 핵심은 모르는 작품에서 최소한의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이다. 그래서 시 자체를, 배우지 않은 시들을 접해보는 경험의 누적은 국어 역량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현대시 공부하는 방법을 정리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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