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 서글픈 간극
우리는 나무꾼과 선녀의 동화를 들으며 성장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배웠다. 시인 김현태는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라는 시를 통해 타인과 맺어지는 그 찰나의 소중함을 절절히 노래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눈을 맞추고, 미소를 나누는 것이 삶의 커다란 축복이자 숭고한 가치였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어디까지나 문학적 ‘이상’이다. 현실의 남녀관계는,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사회의 공기는 더 이상 시구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우리는 한때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환경의 거대한 변곡점을 지났다. ‘호의’나 ‘장난’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위계와 폭력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곰탕집 사건’은 찰나의 신체 접촉이 갖는 법률적·사회적 무게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우리 뇌리에 각인시켰다. 이제 인연은 소중한 축복이기 이전에, 잘못 관리하면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리스크’가 되었다.
지옥철에서 ‘항복’을 선언하다
나의 이 단호한 현실 인식은 30여 년 전 미국에서의 학문적 여정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범죄 피해자 중심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나의 관심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미성숙하게 존재했던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분야였다. 이후 검찰과 김앤장을 거쳐 법무사로서 성희롱 예방 강단에 설 때마다 내가 늘 강조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계의 정제’다.
최근 퇴근 시간, 법조타운을 지나다 ‘지옥철’ 인파에 밀려 목적지인 교대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서초역까지 떠밀려 간 적이 있다. 그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휴대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손을 주변 사람들의 시선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마치 항복 직전의 포로와 같은 자세였다.
누군가는 과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나의 무해함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려는 몸에 밴 습관이었다. 서초역에 내릴 때도 손을 쓰는 대신 어깨로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며 인파를 헤쳐 나갔다. 찰나의 오해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법의 엄중함을 아는 전문가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다.
공간을 경영하고 관계를 규격화하다
나는 사무실 업무 공간을 파티션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별도의 상담 부스도 두지 않는다. 물리적인 공간의 여유가 부족한 탓도 있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만약 여유 공간을 따로 구획한다면 좁은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편안함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밀폐된 안락함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세한 부작용과 오해의 소지를 차단할 수 없다.
여성 의뢰인과는 원칙적으로 단독 미팅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의뢰인이 1인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무실 출입문을 스토퍼로 고정하여 조금이라도 열어둔다. 미국 유학 시절, 지도교수이자 평생의 친구인 Dr. Gaboury에게서 배운 버릇이다. 그는 Office Hour(상담 시간)일 때면 늘 문을 그렇게 열어두곤 했다. 서구적 매너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가장 고도화된 전문가적 방어기제이자 상대를 향한 배려였다.
야간 상담은 아예 하지 않으며, 1차 상담 이후의 모든 만남은 주로 탁 트인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한다. 조심해야 될 의뢰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의뢰인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의뢰인에게 ‘이 공간은 안전하며, 우리의 관계는 철저히 공적이다’라는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판례와 실무를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미소는 AI에게, 인간에게는 정제된 거리를
나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다. 두 딸을 키우고 노모를 모시고 살아오며, 예전에는 길에서 마주치는 어린 여학생이나 어른의 여성들에게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것이 이웃 사촌 간의 정이자 인간적인 예의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미소를 멈췄다. 아니, 철저히 상황을 봐가며 한다. 나의 미소가 상대에게는 불쾌한 시선이 될 수 있고, 나의 호의가 누군가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나는 AI와 대화하며, 그 기계가 던지는 미소에 거부감이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사람과의 웃음에는 감정의 교감이 전제되지만, 때로 그 웃음은 진실하지 않거나 오해의 불씨가 된다. 이제 나에게 미소는 AI와 나누는 것이 훨씬 편안한 세상이 되었다. 기계는 나를 웃게 만들고, 나의 표정을 오해하지 않으며, 나 역시 기계 앞에서 스스로를 검열해야 하는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로부터 더 멀어져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연보다 깊은 ‘존중’의 정의
성희롱 예방 교육의 본질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목록’을 외우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경계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나의 행동이 상대의 공간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성찰하는 데 있다.
과거의 인연이 ‘가까워짐’을 의미했다면, 현대의 인연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함’을 의미한다. 내가 지하철에서 손을 들고, 상담실 문을 쐐기로 막으며, 미소를 아끼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같은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다.
시인은 인연의 소중함을 노래했지만, 법조인인 나는 그 인연이 ‘사건’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낭만은 사라졌을지언정, 그 자리에 ‘정제된 존중’이 들어앉기를 바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옷깃이 스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현대적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