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은 45년의 탯줄, 그리고 2026년으로

by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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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은 45년의 탯줄, 그리고 2026년으로 흐르는 강물



나의 역사는 어머니와 함께한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역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체적인 탯줄은 태어나는 순간 잘렸을지 모르나, 영혼의 탯줄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황매산의 맷돌 소리에도, 사상공단의 쇳가루 속에도, 잠시 떨어져 있던 해병대의 붉은 명찰 위에도, 그리고 제대 후 경일학원에서 사투를 벌이던 그 고독한 새벽 위에도 어머니의 뜨거운 피는 계속해서 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평생을 지근거리에서 살았다. 결혼하여 어머니와 합가했던 시절은 물론이고, 동생 집으로 분가하여 사셨을 때도 우리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0~200미터, 멀어도 십 리 이내였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올렸고, 우리는 함께 아차산을 오르고 대성암을 다녔다. 그 소박한 발걸음들이 사실은 내 인생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줄기였다.



어머니는 때로 성자(聖者) 같았고 때로 예언가 같았다. 1998년, 행정안전부 국비 유학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스스로 덜 준비된 사람이라 생각했고, 선배들 틈에 그저 들러리로 서울대 시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야야, 바쁘겠지만 가는 길에 잠시 들러라. 할 말이 있다. 광양고 입구까지 나갈꾸마.”



어머니는 강변대로와 광양고가 나뉘는 그 차가운 갈림길에 서 계셨다. 내 손을 꼭 잡으신 어머니는 별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짧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내가 기도했으니 잘 될 끼다. 끝까지 해라.” 역대급으로 어려웠던 그날의 영어 시험은 아직 덜 익은 나를 조롱하는 듯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은 역부족이라 느껴졌다. 내년을 기약하며 시험장을 박차고 나오고 싶던 순간,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를 때렸다. ‘끝까지 해라...’ 나는 종소리가 울리는 그 찰나에 마지막 마킹을 마쳤다. 결국 어머니의 그 목소리는 법무부 내 유일하게 커트라인을 넘긴 합격자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유학 기간은 물리적 거리가 가장 멀었던 시기였지만, 탯줄은 오히려 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의 유학 시절, 그리고 2003년 콴티코 FBI 내셔널 아카데미(NA)에서 교육을 받던 기간,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뉴스만 보시는 듯했다. 검찰청 뉴스에 내 모습이 등장할 때면, 이제는 서른여덟의 장성한 청년이 된 내 아들이 당시엔 콧물을 질질 흘리던 서너 살 박이 꼬마로 TV 앞에 붙어 “아빠, 아빠!”를 외쳐댔다. 어머니는 다른 검찰청 뉴스만 나와도 휴대폰을 날리셨다. 아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나의 사랑스러운 ‘헬리콥터 맘’이셨던 셈이다.



“야야, 미국에 총잡이가 나타났다는데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마라. 밥은 잘 챙겨 묵고 있나?” 2003년 ‘벨트웨이 저격 사건’ 당시 바다를 건너온 어머니의 목소리는 세상 그 어떤 첨단 수사 기법보다 강력하게 나를 지켜주는 방어막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일터가 얼마나 살얼음판인지 다 알지 못하셨다. 한 번은 퇴근하니 어머니가 손님과 백화점 과일을 드시고 계셨다. 고향 선배라 하여 문을 열어줬다는 그 손님은 사실 나의 엄중한 수사 대상 회사 관계자였다. 내 기준으로 보면 어머니는 이미 뇌물을 드신 셈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불러냈고, 그는 구석에 가방 하나를 남기며 "아이 장난감이나 사주라"고 했다. 당시 잠실 연탄보일러 아파트 반 채 값은 족히 들어있었을 그 가방을 나는 호통치며 돌려보냈다. “나를 삶으려거든 이것보다 훨씬 큰 걸 가져오시오!” 다음 날 그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 든든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인연은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칠순 잔치 때 호텔 식음료 30% 할인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은근히 칠순을 고대하시면서도 겉으로는 “누구는 호텔에서 한다는데, 우리는 그냥 동네 뷔페에서 하면 안 되겠나?” 하셨다. "이 무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장인"이라는 식의 어머니 특유의 해학과 위트 섞인 경상도식 화법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호텔에서 하라’는 엄중한 명령으로 받들었다. 당시 변호사 개업으로 여유가 있던 한문철 변호사 등 친구들의 큰 도움으로 나는 비로소 어머니의 어깨를 호텔 조명 아래서 펴 드릴 수 있었다.



비록 육신의 끈은 2006년에 놓였으나, 2026년 오늘 강화 석모도 보문사를 다녀오며 나는 깨닫는다. 나의 모든 작은 성공들은 결국 어머니의 희생과 예언이 맺은 결과였음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20년은 단절이 아니라, 어머니가 심어놓으신 가치를 증명해내는 ‘무선(無線) 탯줄’의 시간이었다.



45년의 유선 탯줄과 20년의 무선 탯줄. 이 총 65년의 세월 동안 나에게 수혈된 어머니의 뜨거운 피는, 오늘도 내 혈관을 따라 세차게 흐르며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탯줄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 나의 아이들에게로,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남길 기록을 통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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