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떠나고 싶다"라고 처음 느꼈던 순간
"어디든 떠나고 싶다"라고 처음 느꼈던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살다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져 내 의지조차 희미해지려 할 때, 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갈망했다. 돌이켜보면 46년 전 아버지와 이별한 직후, 상실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던 그때였을 것이다.
고시 공부를 위해 송광사로 떠나려던 김호중 형이 서면도서관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수소문하여 집으로 찾아왔다. 형은 슬픔에 잠긴 나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부산역으로 배웅 나간 나를 이끌고 경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형은 자신의 공부 밑천을 털어 순천행 대신 경주를 선택했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경주에서, 내 인생 첫 번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경주에서 수많은 풍경과 사람들을 만났다. 분황사 모전석탑 옆, 한 스님이 웃통을 벗은 채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있었다. 차림새가 불경스럽다고 지적하자 스님은 "세상천지에 부처님 안전(案前)이 아닌 곳이 없다"라는 대오(大悟)의 한마디로 나를 일갈했다. 내가 혹시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씀하시는 거냐고 되물었다. 스님은 "어허, 제법이구나" 하시며 나를 기특한 듯 바라보셨다. 모든 것은 결국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가르침이었다.
불국사로 향하던 11번 시내버스 차장 아가씨는 상심에 젖은 나에게 정겨운 친절을 베풀었다. 두세 번 버스를 탈 때마다 마주친 그녀는 정류소마다 이름을 목청껏 외치고 여행객을 위해 설명을 곁들이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콩나물 해장국집 아주머니는 내 얼굴이 까칠해 보인다며 자신이 쓰던 ‘구리모(크림)’를 선뜻 내어주었다. 이십 대 두 청년의 합숙을 처음엔 야릇하게, 나중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던 여관 주인아주머니도 있었다. 길 위에서 마주친 이 소박한 온기들이 무기력했던 나를 서서히 깨웠다.
그곳에는 화려한 영화를 뒤로하고 세상을 등진 수없는 신라의 왕들과, 전생과 현세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의 혼도 함께 있었다. 아버지와 이별하고 경주로 떠나온 나의 발길은, 부모를 기리며 사찰을 세웠던 김대성 재상의 지극한 마음과 묘하게 맞닿아 있었다.
경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늘 상상해왔던 곳이다. 어머니를 힘들게 해드리지 않으려 승공 학생회 간부 연수 일정조차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경주의 모든 풍경이 눈부시게 신선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맑게 해 준 것은 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했던 호중 형의 따뜻한 눈빛이었다. 그 고마움을 나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
내게 '떠남'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저 너머의 나를 찾아 나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단호한 결단이다. 그날의 갈망은 나를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 위로 떠밀었다.
여행은 풍경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만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처음의 떠남은 벽 앞에서의 탈출이었으나, 지금의 여행은 더 넓은 세상을 품고 사람의 온기를 나누는 성숙한 과정이다. 그 갈망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삶이라는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