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姜世晃)은 삶의 시련을 예술과 학문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통섭형 지식인이었다. 나의 롤모델인 그의 삶을 돌아본다>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가였다.
통섭: 전통적인 남종 문인화 대가, 서양화 원근법과 음영법을 수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개척함
지식인: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학문적 소양과 철학을 담아내는 문인화(文人畫) 정신 구현
승화: 긴 세월 동안 예술과 학문 수양에 매진하여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정조의 총애를 받음
신동(神童)의 탄생과 좌절
강세황은 숙종 39년(1713년)에 한양의 명문가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적 권위 면에서 영의정에 준하는 대제학을 지낸 아버지 강현과 대사헌을 지낸 할아버지 강백년의 후광을 등에 업은 금수저였다.
강현은 63세에 얻은 막내아들 강세황의 비범한 재능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여덟 살의 나이에 숙종 앞에서 시를 지어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는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런 천재성 일화는 율곡 이이의 <팔세부시(八歲賦詩)>1)처럼 조선 시대 명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가문이 영조 4년에 발발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큰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이천부사로 있으면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형 강세윤이 이인좌의 난 주역 중 한 명인 정세윤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하여 강세황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 지역별 초시를 거쳐 한양에서 240명이 응시하는 복시에서 정치적 연좌제로 여러 번 낙방하였다.
낙향: 좌절이 아닌 주체적인 선택
좌절의 연속 속에서 그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32세의 나이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경기도 안산으로 낙향하였다. 그의 결정은 사회적 명예의 포기였으며, 사회적으로 '실패'라는 주홍글씨를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또한 낙향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지적 교류의 현장인 한양을 상실하는 의미도 있었다.
안산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처남이자 벗으로 승지의 벼슬에 있던 유경종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든든한 정신적, 사회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강세황의 낙향은 단순히 실패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다. 이는 속세의 명예를 버리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낙향이 가져온 재창조의 기회
강세황은 이 어려움을 예술가로서 자신을 재창조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속세의 명예를 내려놓고 안산에서 '표암'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학문과 예술에 오롯이 전념했다. 만약 그가 계속 과거에 매달렸다면, 우리는 '조선의 예술가' 강세황이 아닌 '평범한 관료' 강세황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낙향은 좌절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낙향한 다음 해인 1745년 태어난 훗날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는 단원 김홍도2)를 알아보고 키워내는 위대한 멘토 역할을 한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키워 그의 예술적 길을 열어준 위대한 스승이자 후원자였다.
김홍도가 29세일 때 강세황은 정조3)에게 도화서 화원으로 김홍도를 천거한다. 그 후 단원은 정조의 어진을 그리고, 정조의 국책사업에 참여하는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환경은 다소 다르지만 영조에게 겸재 정선이 있었다면, 정조에게는 단원 김홍도가 있었다. 강세황은 이런 김홍도의 스승이고 멘토였다.
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통섭의 선구자
안산에서의 삶은 강세황의 예술을 꽃피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전통 화법에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결합하는 등 자신만의 독창적인 통섭형 화풍을 완성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한 평가: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해 깊은 감식안을 보여주며 여러 작품에 직접 비평을 남겼다. "흐린 눈이 갑자기 밝아지는 듯하다"고 극찬하였다. 특히 정선이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조선 산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독자적인 화법으로 그려냈다”고 평가하였다.
동시에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두고는 "바위며 봉우리 처리가 미숙했다"고 혹평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러한 심미안과 용기 어린 평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오직 예술의 본질만을 탐구하는 진정한 학자다운 내면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금강산 유람에 대한 입장:
강세황은 "산에 다니는 것은 고상한 일이나 금강산 여행은 가장 저속한 일"이라고 말하며, 너도나도 몰려드는 유행성 유람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금강산을 방문한 것으로 비난받지는 않았다. 회양부사로 있던 아들과의 재회, 그리고 정조의 어명을 받아 금강산 사생을 하던 제자 김홍도를 격려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이자 한 집안의 가장, 그리고 스승으로서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이다.
금강산 유람과 평론:
75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채전성산록(采前聖山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유람 중 느낀 감흥과 함께 금강산의 경치를 화가의 시각뿐 아니라 지식인의 평론가적 시각으로 세밀하게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은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활용해 깊이감과 입체감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었다.
이러한 비평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진경산수화의 길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중국의 남종문인화와 서양의 원근법, 명암법을 결합해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였다. 그의 예술은 경계를 허물고 동서양의 지혜를 융합하는 통섭의 결정체였다. 그는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능했던 '삼절(三絶)'이었으며, 문인, 화가, 평론가, 정치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만년의 화려한 재기
나이 72세가 된 1789년, 그의 삶에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강세황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임금 정조의 특별한 배려로 한성부판윤 등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과거 시험을 통하지 않은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더욱이, 아들 강완과 손자 강희언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면서, 강세황 가문은 마침내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고 예술과 관직 모두에서 빛나는 명성을 쌓게 된다. 강세황의 삶은 좌절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자신의 재능을 후대에 전하며 시대를 초월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지식인의 표본으로 남아 있다.
1) 율곡의 팔세부시
初春春到小園中 (초춘춘도소원중) - 초봄 작은 동산에 봄이 찾아드니
雪似梅花梅似雪 (설사매화매사설) - 눈은 매화 같고 매화는 눈 같아라
庭前有樹不知名 (정전유수부지명) - 뜰 앞에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 있으니
一夜狂風花亂飛 (일야광풍화난비) - 간밤 거센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네
2)김홍도
우리가 잘아는 단원 김홍도(金弘道)는 조선 후기 화단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서민들의 생생한 삶을 독창적인 화풍으로 담아내며, 단순한 그림쟁이가 아닌 한 시대의 모습을 기록한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는다. 진정한 청출어람의 본보기이도 하다.
3)정조
정조는 강세황에게 여러차례 서신이나 하교를 통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정조는 강세황의 아들 강완이 문과 식년시 복시의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이사람이 바로 강세황의 아들이구나”라고 했을 정도였다. 강세황의 손자 강희언의 과거시험까지 직접 챙겼을 정도라고 하니 그 가까움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