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동 광평대로에 묻다: 피의 왕좌가 '필경재가

by 박성기



수서동 광평대로에 묻다: 피의 왕좌가 '필경재'가 되기까지



조선의 건국은 찬란한 도약이었으나, 그 이면의 '왕의 자리'는 잔혹한 시험대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평온하게 걷는 강남의 광평대로에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명예를 버리고 혈육을 베어야 했던 왕들의 고단한 서사가 있습니다.



'권지(權知)'라 불린 고립된 왕좌


1392년,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완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앉은 왕의 자리는 안팎으로 철저히 고립된 자리였습니다. 명나라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장남 이방우는 아버지를 등지고 함경도 철령땅에 은거해버렸습니다. 1394년 고단한 한양 입성길, 이성계의 발걸음에는 자식마저 외면한 왕좌의 불안함에 왕궁도 건설 중인 상황이라 앞날의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설계자 정도전의 오판과 피의 영추문


이 불안한 왕좌에 비극의 불씨를 당긴 것은 설계자 정도전의 실책이었습니다. 그는 선각자였으나 현실을 잘 몰랐습니다. 재상 중심의 국가를 꿈꾸며 어린 8남 방석을 세자로 세웠습니다. 이는 '개국공신' 이방원의 인간적인 분노를 계산하지 못한 오판이었습니다. 결국 1398년, 경복궁 영추문 밖은 피비린내로 진동했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남온을 포함한 자신의 이복동생들인 7남 방번과 8남 방석 세자를 베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함흥의 화살과 아버지의 분노


1398년 2남 정종이 즉위하였고, 이듬해인 1399년 피비린내 나는 한양을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 비극은 대물림되었습니다. 그러나 1400년, 4남(이방간)이 5남(이방원)을 제거하려는 제2차 왕자의 난이 다시금 일어났습니다. 정종은 결국 그해 11월, 이방원(태종)에게 양위하며 왕좌에서 물러납니다.



마침내 1400년 태종이 등극하여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하였으나 비극은 대물림되었습니다. 자식들의 살육에 환멸을 느낀 이성계는 고향 함흥으로 떠나버렸고, 1402년 아들 태종을 향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조사의의 난).



세종은 할아버지가 쏜 화살이 아버지의 심장을 겨누는 지독한 골육상쟁. 이 모든 아수라장을 목격하며 자랐습니다. 세종에게 왕의 자리란 '아버지가 짊어진 피의 업보를 닦아내야 할 수행자의 자리'였습니다.



세종의 설계: 영혼을 거두는 보은


태종은 즉위 후 1401년, 명나라로부터 9년 만에 정식 '조선국왕' 책봉을 받아내며 외교적 정통성을 다졌습니다. 1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세종은 그 토대 위에서 비로소 '치유'를 시작했습니다세종은 아버지가 앗아간 숙부들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양자로 보냈습니다. 숙부 방번(7남)의 양자로, 5남 광평대군 (수서동 가문의 시조)을 숙부 방석(8남)의 양자로 6남 금성대군을 보냅니다. 광평대군은 요절하나 그 후손이 번창하여 오늘날의 광평대군파를 형성합니다.



세종은 "아버지 이방원은 죽였으나 나는 숙부를 계승한다"는 보은의 설계를 합니다. 그리하여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잊혔던 숙부들은 비로소 조선 왕실의 정식 계보로 돌아왔습니다. 명나라가 비웃던 '임시'의 자리를, 세종은 죽은 자까지 보듬는 '도덕적 정통성'으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세조)은 할아버지 이성계가 보여준 '힘에 의한 찬탈'을 정당성 삼아 다시 칼을 들고 단종을 몰아냅니다. 금성대군은 조카 단종을 지키려다 형에 의해 사약을 받습니다. 이성계가 쏘아 올린 역성혁명의 불씨가 세종의 보은마저 짓밟은 셈입니다.



필경재, 반드시 공경하라


이성계가 만든 '복잡한 세상'과 '저버린 도리'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은 광평대군의 손자 이천수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왕손이었기에 과거 시험조차 볼 수 없었던 그는 문음(음서)을 통해 관직에 나갔으나, 중앙 정계의 화려함 대신 수서동에 필경재(必敬齋)를 지었습니다.



'반드시 공경하라'는 뜻의 집 이름은 권력을 위해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던 창업 세대의 과오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자 선언이었습니다. 이천수는 벼슬의 높낮이보다 '예(禮)'와 '경(敬)'을 선택함으로써, 권력은 짧으나 사람의 도리는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광평대로에 흐르는 치유


결국 이성계는 천하를 얻었으나 자식을 모두 잃은 비운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짙은 회한은 오늘날 수서역을 지나는 광평대로를 거쳐 필경재에 이르러서야 안식을 찾았습니다.



이 길은 영추문의 피비린내를 견디고, 함흥의 화살을 피해, 마침내 세종이 설계하고 후손 이천수가 지켜낸 '치유의 종착지'입니다. 가문의 진정한 설계는 권력을 쥐는 힘이 아니라, 찢겨진 상처를 어루만져 미래의 터전으로 만드는 '보은과 공경의 마음'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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