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땅이었던 소이산에서 '북한땅'을 바라보며

by 박성기


<북한 땅이었던 소이산에서 북한땅을 바라보며>


KakaoTalk_20250914_102147937_01.jpg?type=w1 소이산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와 그 너머 북한땅

강원도 철원 소이산 정상에 서서 철원평야를 내려다본다. 강화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해 고성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DMZ 여정 중, 이곳 소이산은 유독 내 발걸음을 오랫동안 멈추게 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다. 가을볕이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우고, 바람은 나지막이 억새풀을 흔들고 있다. 38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기습 남침이 일어났던, 75년 전의 그날이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38선 이북에 있었던 소이산에서 남한을 바라보는 일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이 땅이 남한 영토가 된 것은 휴전선이 새로 그어진 이후의 일이다. 과거 북한 땅을 우리가 수복하여 북한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이곳에 서 있는 내게 더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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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로 북한 방향 270도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문득 생각했다. '북한에게는 이곳이 천연의 방어선이었겠구나. 그런데 우리는 왜 무방비였을까?' 바로 남한 방향 90도로 펼쳐진 철원평야가 그 답을 말해주었다. 마치 길을 내어주려는 듯 너른 평원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는 최고의 진격로였다. 험한 산을 넘을 필요 없이, 그저 곧장 서울을 향해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길. 한국전쟁의 비극은 그 길의 한복판에서 시작되었음을 이제야 몸으로 깨닫는다. 당시 우리 군은 지형적 불리함은 물론이고 북침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북한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제 정세 판단에 근거해 전쟁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낮았기에,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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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T-34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제105 전차여단을 앞세워 평탄한 의정부 축선을 통해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고,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이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제7사단은 철원평야가 끝나는 지점, 즉 38선 바로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북한의 T-34 전차에 대항할 무기도, 제대로 된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한 채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야만 했다. 이처럼 한탄강이 흐르는 철원평야는 동부와 서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우회해 서울로 향하는 핵심 통로였기에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북한은 단순히 한 곳을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38선 전체에 걸쳐 동시다발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하는 전략을 택했다. 제105 전차여단이 의정부 축선을 통해 서울을 노리는 사이, 이곳 철원과 김화, 그리고 북한 지역의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는 전쟁의 판세를 좌우하는 핵심 요충지가 되었다. 이 삼각지대는 주요 교통로가 교차하는 곳이자 기계화 부대가 자유롭게 기동 할 수 있는 평야였기 때문에, 이곳을 장악하는 쪽이 한반도 중부 전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철원평야를 지나 남하한 부대들은 후방에서 지원과 보급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KakaoTalk_20250914_102147937_03.jpg?type=w1 가운데 높은 산이 고암산, 김일성 고지


또한, 김일성은 이 삼각지대 중심부의 해발 780m 고지인 고암산에 직접 지휘소를 두고 작전을 지휘했다. 험준한 산세가 천연의 요새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는 안전하게 전선 전체를 내려다보며 세밀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처럼 험준한 산악지대를 우회하며 병력을 분산시키고, 우리 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남한 전체를 마비시키는 치밀한 전술이었다. 험한 산을 넘을 필요 없이, 곧장 서울을 향해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길. 한국전쟁의 비극은 그 길의 한복판에서 시작되었음을 이제야 몸으로 깨닫는다.



소이산 방공호에서 한국전쟁 참전 미군 희생자를 만났다. 그들의 희생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백마고지 전투의 희생과는 무관하다. 당시 소이산은 백마고지처럼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철원평야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전쟁 초기와 전선이 고착된 시기에 미군이 북한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이 땅이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소이산 전투와는 별개로, '철의 삼각지대'에서 일어난 가장 격렬한 고지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전투는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유엔군에게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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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려 보면, 우리는 항상 당하고 후회하는 역사를 반복해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던 것처럼, 지금의 경제 전쟁에서도 우리는 예측하지 못하고 방어하지 못해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소이산에 서서 깨달은 것은, 과거의 비극은 단순히 물리적인 무방비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뿐만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대응할 만한 국가적 시스템과 정신이 아직 충분히 확고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을지라도, 내면의 규칙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75년 전의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정성과 절차의 미비함이라는 치명적인 '무방비'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한국전쟁 당시 T-34 전차가 '미지의 무기'였던 것처럼, 지금의 경제 전쟁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첨단 기술이다.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바이오 등 미래를 선도할 핵심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기술 개발을 넘어, 전 세계 기술 동향과 경쟁국의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하고 예측하는 정보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전쟁 당시 보급로가 끊기면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듯이, 현대 경제에서는 공급망이 생명줄과 같다. 특정 국가에 의존적인 공급망은 큰 약점이 될 수 있기에, 핵심 자원과 부품의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이산 정상에 서서 북녘을 바라보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다시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견고한 시스템과 굳건한 정신을 물려주려는 맹세였다. '점진적으로 계속 진화하는 나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 작은 언덕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성장을 넘어, 공동체를 지키고 미래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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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산에서 노동산 철원당사 골조와 경성지방법원 철원지원이었던 장소로 하산하였다. 우리 공동체가 다시는 그런 무방비 상태에 놓이지 않도록 해야겠다. 굳건한 국방시스템과 강인한 정신을 세워야 한다는 깊은 사명감이 내면에서부터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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