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항상 가슴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조선 후기 정국의 격랑 속에 있던 두 인물, 최명길(崔鳴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두 분 모두 국가를 사랑했지만, 위기 앞에서 그들이 택한 길은 '변통(變通)'과 '정도(正道)'로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1. 광해군에게 인정받은 엘리트, 최명길
최명길은 선조 때인 1605년 증광시(增廣試)에 삼장 급제했으나 건강 문제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광해군 3년(1611년) 공조좌랑이 되면서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당시 조정은 폐모살제 논의로 혼란스러웠지만, 최명길은 뛰어난 행정 능력과 문장력으로 광해군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원칙은 끝내 대북파의 전횡과 충돌했습니다. 최명길은 영창대군 처단론이 일던 무렵, 명나라 차관 입국 당시 발생한 '이홍임 사건'을 조사합니다. 최명길이 이홍임을 석방하자, 권간 이이첨 등의 강경 대북파에 의해 삭탈관직을 당합니다.
이후 영창대군 살해와 폐모론이 연이어 진행되었고, 광해군이 이원익, 이귀, 최명길 등을 사면했지만, 4년 후 그들은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조반정은 조선의 역성혁명, 계유정난, 중종반정의 학습 효과가 크게 작동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2. 겉과 속을 달리 드러낸 광해군, 그리고 나의 고뇌
저는 이 지점에서 최명길과 생각이 다릅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가 사실 이이첨 등의 모략에 의한 것이었고, 광해군이 종묘사직을 위한 선택이라 강변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한번 모신 군주를 그렇게 배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해군이 이이첨을 견제하기 위해 이원익 등과 함께 최명길을 사면한 것은 소통 가능성이 높았다는 방증입니다. 최명길이 이원익 등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상소를 올려 폐모살제 이후의 민심 수습 방안을 논의 했어야만 합니다. 권간을 견제하여 성군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소통이 막혔다면, 나라면 남명 조식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남명은 명종이 단성현감을 제수했을 때 벼슬을 거부하며 단성소(丹城疏)를 올렸습니다. 그는 대비와 임금을 "궁궐의 한낱 과부와 외로운 아들"로, 나라를 "백 년 된 큰 나무"에 비유하며, 왕의 도덕적 결함과 국가의 위기를 강력하게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군주에게는 직접적인 저항과 직언을 택했을 것입니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버리는 것을 택했습니다. 훗날 병자호란 때는 "나랏 일은 필부의 절개와 다르다"며 김상헌이 찢은 항복 문서를 일일이 주워서 붙여 원본을 완성한 냉철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최명길의 선택은 국가생존을 위해 군신의리를 희생하는 변통이었습니다. 나는 충절을 지키면서 우선적으로 직언과 저항을 통해 군주를 각성시키려 하였을 것입니다.
3. 나는 법치를 통한 '원칙'을 택한다
지금 우리는 조선 시대처럼 왕을 섬기지는 않지만, 매일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팀장에게 직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의 명분'과 '팀의 실리'가 충돌합니다. 회사 내부의 부조리한 시스템에서도 '원칙'과 '변통'사이에서 고뇌합니다.
역사적 선례들을 보면, 최명길이 택한 '변통'은 궁극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조식이 택한 '명분'은 오늘날까지 사표가 되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법(法)이라는 굳건한 토대가 있습니다. 저는 남명 조식의 강직한 정신을 따르되, 현대적인 방법을 활용할 것입니다. 단체의 장이 위법부당한 행위를 할때, 상소문과 같은 형태로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하여 소통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막히면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방법을 택할 것입니다.
남명 조식의 강직한 정신을 현대 법치의 도구를 사용하여 실현함으로써, 최명길의 현실론이 빠질 수 있는 변통의 함정을 피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변증법적 융합입니다.
법을 통해 정당한 명분을 세우고, 비폭력적인 절차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은 중요합니다. 이 길이야말로, 충절과 현실을 모두 아우르는 현대적인 '군자(君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