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과 <금강전도>의 위대한 여정

by 박성기
겸재정선작, <금강전도>

천재 화가, 가난을 딛고 서다

2025년 봄에는 호암미술관에서 <금강전도>를, 가을에는 겸재정선미술관에서 또 <금강전도>를 만났습니다. 하늘이 조선에 내린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의 삶과 그의 역작 <금강전도>의 탄생 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1676년 한성부의 북쪽, 백악산 기슭 유란동(지금의 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난 겸재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타고난 재능만큼은 그 어떤 어려움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품과 실력으로 명문가인 김수항 집안의 후원을 받았고, 특히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여섯 아들, 즉 ‘육창(六昌)’은 그의 삶에 큰 은인이 되었습니다.


김수항의 큰 아들 김창집은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로, 20세의 겸재에게 도화서의 그림 기법을 접하게 해주었고 그의 관직(음직)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김창협은 장형인 김창집을 수행하며 겸재의 그림을 청나라에 알렸습니다. 당시 겸재의 그림 한점의 가격이 청나라 1급 궁정화가의 연봉이 넘을 정도였다는데, 이에는김창협의 공이 큽니다.


김창흡은 겸재의 학문적 스승으로서 진경산수화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김창흡은 사천 이병연의 스승으로 겸재와 사천을 연결해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백담사 지나 봉정암 가는 길의 영시암을 지은 인물로도 친숙하지요. 또한 김창업은 겸재에게 문인화의 깊은 세계를 전수하고, 그의 예술적 시야를 넓혀주었습니다.


모두가 꿈꿨던 금강산, 진경산수화의 서막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동아시아 최고의 성지이자 여행지였습니다. 중국의 대문호 소동파도 조선에 태어났으면 금강산을 가봤을 것이라 했을 정도입니다. 금강산은 예로부터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했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이곳의 산사에서 1년간 수행했고, 율곡의 친구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길에 금강산에 들른 감동을 <관동별곡>에 담아냈습니다.


임금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강산을 향한 열망은 대단했습니다. 정조대왕은 직접 갈 수 없자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에게 금강산을 그리게 했습니다. 또한 제주도의 유명한 의녀 김만덕은 수많은 사람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상으로 금강산 기행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는 정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평생의 소원인 금강산에 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는데 당시 금강산은 모두가 여행하기를 꿈꾸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금강산 여행은 교통수단부터 숙박, 인건비까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기에, 보통 사대부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았습니다. 한양에서 포천, 철원, 김화를 거쳐 금강산까지 가는데 1주일 이상 걸립니다. 거기서 금성(피금정, 단발령),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돌아오는 금강산 여행은 30일 이상 소요됩니다. 교통수단으로 말 또는 나귀 1필이 필요합니다. 말과 나귀를 다루는 노복도 최소한 1명이 필요합니다. 단발령 너머 내금강, 외금강 고지대는 藍輿(남여) 1대와 이를 이동하는 사람이 2명 이상 필요합니다. 주막이나 사찰의 숙식, 숙박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藍輿 운반은 내금강은 장안사와 표훈사, 외금강은 유점사, 신계사의 젊은 스님들이 맡았습니다. 스님의 수고비에 사찰의 시주비용까지 감안하면 보통 사대부에게도 금강산 기행은 화중지병이었습니다.


강세황은 "산에 다니는 것은 고상한 일이나 금강산 여행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중에 그의 아들 강완(姜完)이 금강산 입구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있을 때 금강산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선비 연암 박지원은 김조순 후원으로 금강산을 다녀왔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양반 신분 때문에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겸재에게도 금강산을 간다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오랜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1711년 8월, 겸재의 이웃에 사는 한양 장동의 거부 신태동이 여행 경비를 전액 부담하며 금강산 그림을 부탁하였습니다.

겸재는 당시 철원 삼부연에 머물며 금강산 지리에 밝았던 스승 김창흡과 동행했습니다. 만이천 봉우리의 웅장함에 압도된 그는 이 거대한 풍경을 한 폭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에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각각 나누어 그리는 ‘분도(分圖)’기법을 활용했습니다.


이는 훗날 <신묘년풍악도첩>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겸재는 그림 속 봉우리, 계곡, 사찰의 이름(비로봉, 계향성, 중향성, 대향암, 소향암, 사자암, 사자봉, 관음봉, 영도봉, 장경봉, 십후봉, 오현봉, 해돈봉, 백마봉, 혈망봉, 원통암, 정양사, 삼불암, 백련암, 장안사, 표훈사, 보덕암, 금강대, 금포대, 망고대, 비룡담, 벽화담, 만폭동, 혈정루, 백천동. 비룡교, 봉선대 등)을 모두 기재하여 그림을 보는 사람이 마치 지도를 보듯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23년의 절차탁마, 금강전도의 완성

겸재는 이듬해인 1712년에도 금화현감으로 있던 친구 이병연의 초청으로 다시 금강산을 찾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금강산의 모습은 그의 붓끝에 완전히 익숙해졌습니다. 중국의 관념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인 필법으로 그려낸 그의 진경산수화는 조선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관아재 조영석은 그의 그림을 “개벽”이라며 극찬했습니다. 이후 겸재는 관직에 오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겸재는 계속하여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였고, 1716년 봄 41세에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상삼 겸교수라는 종6품직에 오릅니다. 그해 10월 겸재의 외삼촌이 주최한 공조판서를 역임한 89세인 이광적의 과거합격 60주년 기념, ‘회방연’을 그려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1726년 화양현감 임기를 마치고, 1727년 인왕곡으로 이사하여 관직을 맡을 때를 제외하고는 32년간 그곳에 머무릅니다. 겸재는 필운대상춘, 취록원 등 인왕산 주변을 그리기도 하고, 사천을 위해 대관령도, 노송영지도를 그리기도 합니다. 주변의 부탁으로 단발령금강산, 장안사, 만폭동, 금강내산총도 불정대관폭, 삼일포 등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립니다.


1733년 58세때 청하현감으로 부임하여 도산서원도, 해인사도, 성류굴도, 쌍계입암도, 내연산삼룡추도를 그리면서 진경산수화의 절정기에 이릅니다.


겸재는 1934년 갑인년 겨울, 금강산의 겨울 모습을 다시 그립니다. 그간 ‘분도’를 그리거나 ‘총도’를 그린 것을 모읍니다. 금강산을 처음 보고 깨달음을 얻은 지 23년 만에, 59세의 나이로 대작 <금강전도>를 완성합니다. 긴 세월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 끝에 완성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조선의 진경(眞景)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금강전도>는 뼈처럼 앙상하게 솟은 봉우리들을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한 '골산(骨山)'과 부드러운 '육산(肉山)'을 대비시켜 금강산의 웅장함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직접 유람하는 듯한 와유(臥遊)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금강전도>에 붙여진 김희겸의 시는 그 와유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萬二千峰皆骨山(만이천봉개골산) 일만 이천봉 개골산

何人用意寫眞顔(하인용의사진안) 누가 정성껏 참모습 그리려했나

衆香浮動扶桑外(중향부동부상외) 뭇 향기 동해 밖까지 퍼지고

積氣雄蟠世界間(적기웅반세계간) 쌓인 기운 세상에 서려 있네.

幾朶芙蓉揚素彩(기타부용양소채) 몇 송이 연꽃 맑은 빛을 내뿜고

半林松栢隱玄關(반림송백은현관) 소나무 잣나무 절 문을 가리네.

縱令脚踏須今遍(종령각답수금편) 발로 걸어 두루 본다 하여도

爭似枕邊看不慳(쟁사침변간불간) 어찌 베갯머리에서 그림을 보는 것만 하리오


이 시구처럼 <금강전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겸재의 삶과 예술혼이 응축된 위대한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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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1740년에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65세였으며, 이곳에서 1745년까지 5년간 재직했습니다. 이 기간은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원숙한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사천 이병연과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약속하고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며 <경교명승첩>을 완성했습니다. <경교명승첩>에는 양천현 주변의 아름다운 한강 풍경이 담겨 있어, 겸재가 산만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 강변의 정취까지 화폭에 담았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751년, 76세의 겸재정선은 <인왕제색도>를 통해 진경산수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며 그의 예술혼을 영원히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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