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 키를 누르던 새벽 3시, 나의 성장을 마주하다
전송 키를 누르던 새벽 3시, 나의 성장을 마주하다
오늘 있었던 고양지원의 재판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 사건 중 하나였다. 오직 공익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다수와 투쟁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벌써 한 달 이상 이번 재판 준비에 매달려 왔다. 특히 지난 일주일간은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부었다. 평소 지켜오던 글쓰기 루틴마저 변경될 정도로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다다랐던 그 며칠 전의 새벽,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화면 속 깨알 같은 글자들을 쫓으며 낯선 출판 계약서와 씨름을 시작했다. ‘인세 조건’, ‘예약 판매’, ‘자동 연장’ 등 생소한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함의를 읽어내야 하기에 머리를 싸맸다. 법률가가 자신의 전공이 아닌 일, 접해보지 않은 분야에 조언을 건네는 것은 명백한 '모험'이었다. 특히 이번 경우는 혹여나 나의 어설픈 조언이 내가 존경하는 동료 작가의 소중한 기회를 망치거나, 계약 성사에 타격을 줄까 봐 두려움이 엄습했다.
평소 내 사무실은 정해진 법률사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새벽이 지나 날이 새면, ‘미국 국토방위군 선한 사마리안 행사 축사’부터 ‘동부지원 대여금 사건’, ‘공인중개사 강남지회장 취임식’까지 처리해야 할 공무와 행사가 즐비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사정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급박함, 그리고 처음이라 모든 것이 막막할 동료의 마음이 나를 먼저 움직였다. 내일의 루틴이 깨지고 수면이 부족해지는 대가는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동료 작가의 권익과 의리라는 가치 앞에, 나의 안위를 계산하는 마음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결국 이것 또한 내가 언젠가 가야 할 길이고, 동료 덕분에 좋은 자료를 미리 검토해 볼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가 아는 모든 진심과 신중함을 꾹꾹 눌러 담아 긴 피드백을 완성했다. 그리고 마지막 전송 키를 누르기 직전, 손가락 끝에 머물던 그 기묘한 떨림을 기억한다. 그 찰나, 나는 내가 이전보다 한 뼘 더 단단해졌음을 직감했다.
예전의 나라고 해도 나의 피로와 손익을 먼저 계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타인의 성취를 보며 은근한 시기심에 마음 한구석을 웅크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새벽, 전송 키를 누르던 내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이 소중한 결실이 온전한 축복이 되기를' 바라는 안도와 염려뿐이었다.
카톡 메시지는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그는 이른 아침 감사의 글을 보내왔다. 내 조언이 얼마나 반영될지, 실제 계약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약 현장에 동석하여 최선의 결과를 함께 만들고 싶었지만, 결과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을 투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심을 다한 뒤 담담하게 나의 내일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은 맑게 개었다.
오늘 재판을 마치고 자유로를 따라오다가 근저당권과 지상권이 혼재된 토지의 새로운 권리분석 의뢰를 받았다. 3개 부동산의 공동담보로 하여 근저당권등기를 준비를 해야 한다. 공유자가 500명이 넘는 부동산의 등기부등본은 인터넷등기소에서 발급받을 수 없다. 하는 수없이 등기부등본 발급을 위해 법원까지 다녀오느라 더욱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시간을 만들어 확인한 단체 카톡방에는 드디어 동료 작가의 출판 계약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쏟아지는 축하의 물결 속에 나 또한 진심을 다해 동참했다. 타인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는 것, 나의 부족함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빛나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의 그릇이 커졌다는 뜻일 게다.
진정한 축하를 통해 영감을 얻기로 마음먹은 순간, 나는 이미 앞서가고 있었다.
올 한 해 내가 가장 크게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은, 화려한 성취의 정점이 아니었다. 바로 그 새벽 3시, 타인의 안녕을 위해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송 키를 누르던 그 뜨겁고도 겸허한 순간 속에 있었다.
성장은 복리와 같아서 당장은 티가 나지 않지만, 이런 진심의 순간들이 쌓여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내 인생의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새벽의 전송 키는 나에게 그 확신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