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봉창 앞에서 창경궁 홍화문을 바라보다: 불통의

by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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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봉창 앞에서 창경궁 홍화문을 바라보다: 불통의 벽과 소통의 문


운현궁의 고즈넉한 마당을 '이어도 지키기 국민운동' 회원들과 함께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낮고 작은 봉창(鳳窓) 앞에 섰습니다. 벽에 구멍을 뚫어 종이를 바른 그 작고 투박한 창은 바깥세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희미한 빛만을 들여보낼 뿐입니다. 19세기말, 이 좁은 봉창 너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어떤 세상을 보고 있었을까요? 아마 그는 이 창을 통해 자신의 야망과 집착으로 가득 찬 조선을 꿈꾸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해양주권(영토)을 지키기 위해 모인 분들과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제 머릿속에는 동시에 또 다른 문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영조 시대,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활짝 열려 있던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입니다. 흥선대원군과 영조, 두 사람은 영조의 현손(고손자)과 고조부라는 깊은 혈통으로 이어져 조선의 부활을 꿈꾼 강력한 개혁가들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본 세상과 소통의 방식은 이 봉창과 홍화문만큼이나 달랐습니다.



시선의 방향: "백성"을 향한 나라 걱정 vs "권력"을 향한 주군 걱정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는 곁에 둔 인물들이 무엇을 '걱정'했느냐에 있었습니다.


영조와 박문수의 '나라 걱정': 연잉군 시절 창의궁(彰義宮)이라는 사저의 낮은 담벼락 아래서 인내를 배우던 영조는 남촌의 가난한 선비 박문수를 만났습니다. 박문수의 통찰은 언제나 '백성의 눈물'에 가닿아 있었습니다. 그는 영조라는 개인의 안위보다, 그가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하는지를 걱정했습니다. 이것이 영조를 '왕의 왕'인 성군으로 만들었고, 홍화문 밖으로 나가 백성과 직접 눈을 맞추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대원군과 천하장안의 '주군 걱정': 반면 흥선군은 몰락한 사저에서 '천하장안(천희연, 하정일, 장순거, 안필주)'이라 불리는 거친 장사(壯士)들과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이들의 통찰은 오직 '대원군이라는 주군의 권세'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주군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끝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들의 걱정은 나라의 안위보다 주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정보 수집과 정적 감시에 집중되었습니다.



개혁의 두 얼굴: 여론을 모으는 '설득' vs 위력을 앞세운 '강압'

두 거인은 놀랍도록 유사한 개혁 과제를 수행했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판이했습니다.


영조는 서원의 폐단을 경고하며 점진적인 정리를 시도했으나 유림의 반대를 고려해 속도를 조절했습니다. 반면 대원군은 "공자가 살아나도 백성을 괴롭히면 용서치 않겠다"라며 전국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전격 철폐했습니다. 결단력은 빛났으나, 소통 없는 강행은 유림이라는 거대한 적대를 낳았습니다.


영조는 속대전을 통해 시스템을 보완하고 질서를 바로잡았습니다. 대원군 역시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체제를 정비했으나, 이는 민생 안정보다는 실추된 왕실 권위를 법적으로 복구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영조는 균역법을 통해 군포 부담을 줄여주려 했고, 이를 위해 1년 넘게 백성들에게 직접 묻는 소통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조세 평등을 꾀했으나, 얻은 재원을 백성의 삶이 아닌 경복궁 중건이라는 토목 사업에 쏟아부어 민심을 잃었습니다.



소통의 질: 진실을 비추는 '거울' vs 본체를 따르는 '그림자'

충신과 심복의 차이는 소통의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박문수는 영조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거울이었습니다. 영조가 감정에 치우치거나 잘못된 길을 가려할 때, 그는 목숨을 걸고 왕의 허물을 비추었습니다. 아픈 진실을 말해주는 거울이 있었기에 영조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탕평과 개혁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천하장안은 대원군의 그림자였습니다. 본체가 움직이는 대로만 따라갔습니다. 대원군이 쇄국을 결심하면 그를 정당화할 정보만 가져왔고, 경복궁 중건을 고집하면 자금을 걷어오는 데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주군의 잘못된 선택을 막아설 '브레이크' 없는 충성은 결국 독재와 불통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역사의 성적표: 영속되는 '유산' vs 단절되는 '종말'

어떤 걱정을 품었느냐에 따라 그들이 남긴 역사의 성적표 또한 갈렸습니다.


박문수가 걱정했던 '민생'의 가치는 영조 사후에도 정조 시대로 이어져 조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공적인 가치를 향한 그의 통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성군의 파트너로서 기억되게 합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깊었으나, 오직 개인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천하장안의 밀실 정치는 대원군의 하야와 동시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주군이 운현궁 봉창 뒤로 물러나자마자 그들은 유배와 처형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적인 야망을 위해 뭉친 인연의 허무한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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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울 점

'이어도 지키기 국민운동' 회원들과 함께 운현궁 마당을 거닐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거인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박문수의 통찰과 주군을 걱정하는


천하장안의 통찰, 그 차이가 역사를 갈랐다."



우리는 지금 어떤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안위(천하장안)만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속한 공동체 전체의 미래(박문수)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해양영토를 지키고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박문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보이지 않는 바다 끝 이어도까지 우리의 해양 주권을 지켜내려는 '이어도 지키기 국민운동'의 혜안은 바로 역사가 증명한 박문수의 '나라 걱정'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영토의 끝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뿌리내린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홍화문처럼 소통의 문을 활짝 열고, 박문수 같은 충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리더십만이 급변하는 오늘날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운현궁의 좁은 봉창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통찰이 주군을 걱정하는 심복의 충성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를 전진시키고 우리 영토와 해양 주권을 굳건히 수호하는 진정한 힘, 즉 '국민과 소통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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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내년에는 더 많은 국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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