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에서 길을 묻고, 서귀포의 이름으로 진면목을 보다
안산에서 길을 묻고, 서귀포의 이름으로 진면목을 보다
역사의 문턱에서 시작된 숙연한 발걸음
독립문역 5번 출구, 산행의 들머리는 묵직한 역사의 공기로 가득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붉은 벽을 지나며,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이곳에서 스러져간 우국지사들의 영령이 가슴속으로 오버랩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이 자유로운 발걸음이 그분들의 고결한 희생 위에 피어난 꽃임을 새기며, 숙연하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안산의 품에 안겼습니다.
안산의 숲, 소금산의 기억을 소환하다
겨울의 한복판임에도 안산은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숲길과 울창한 수목들은 지난 10월, 원주 소금산 그랜드 밸리에서 느꼈던 그 경이로운 자연의 감동을 다시금 불러일으켰습니다.
소금산의 출렁다리가 아찔한 스릴로 우리를 반겼다면, 안산의 숲길은 포근한 위로로 우리를 감싸안았습니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소금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회원들의 따뜻한 배려와 "격조 높은 소프트웨어"는 겨울 산의 추위마저 녹이는 든든한 동행이 되어주었습니다.
소동파의 안목으로 마주한 서울의 '진면목'
무악동 봉수대지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평소 인왕산에 머물며 인왕을 다 안다고 자부했으나, 오늘 안산에 올라서야 인왕의 참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동파의 명시 <제서림벽(題西林壁)>이 이보다 더 절절할 수 없었습니다.
橫看成嶺側成峰 (횡간성령측성봉) :
가로로 보면 산맥이요, 옆에서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모습이 저마다 다르네
不識廬山眞面目 (불식여산진면목) :
여산의 참모습(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
단지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소동파는 산 안에 있기에 그 산의 전체를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노래했습니다. 나 역시 인왕의 품에만 있었기에 그 진면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안산이 묵묵히 제 몸을 내어준 덕분에, 안산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북촌과 서촌, 동촌과 남촌의 정겨운 지붕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병풍처럼 두른 백악과 낙산, 목멱과 인왕의 웅장한 실루엣, 동서남북 수호신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흐릿한 시계 속에서 몽환적인 수묵화로 피어난 서울의 모습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다른 잊지 못할 '진면목'이 되었습니다.
제주산악회에 피어난 성숙한 민주주의의 꽃
오늘 산행의 백미는 하산 후 이어진 '긴급 총회'였습니다. 안산에서 나물을 곁들인 소고기, 돼지고기볶음 와 다금바리가 등장한 풍성을 간식을 먹고, 백련산을 넘어 응암동의 거부감 자국에 이르렀습니다. 세프, '솥밑할망'의 맛있는 감자국 라면으로 송년회가 무르익어 갈 때였습니다.
산악회는 회장 사임이라는 예기치 못한 비상 상황이 발생했지만, 회원들은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위기는 공동체의 품격을 증명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회장을 선출해야 했습니다. 산악회에서 보기 힘든 활발한 찬반 토론 속에서도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회장의 유임, 새로운 회장의 선출 방법에 대하여 낮은 소리들이 오고 갔습니다. 50대의 신진 회장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아직 준비가 덜 된 듯하였습니다. 고문단인지, 중진단인지, 원로급에서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정중한 절차를 통해 '초대회장을 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는 과정'은 실로 경이로웠습니다.
갈등을 봉합하는 소통으로, 혼란을 숙의(熟議)를 통한 합치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작은 산악회에서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바로 이곳 제주 사람들의 따뜻한 가슴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라는 것을요.
산행 시작점에서 보았던 우국지사들의 염원이 오늘 우리 회원들의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만개한 듯하여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송년산악회를 소통으로 맺은 마침표
소금산의 추억을 이어받아 안산의 숲에서 생명력을 배우고, 봉수대에서 진면목을 보았으며, 총회에서 민주주의의 정수를 보았습니다. 소중한 선물을 준비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소외되지 않게 챙겨주신 집행부(홍은표 회장님, 고경선 총무부회장님, 강방근 대장님, 윤공섭 초대회장님)와 회원님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소통의 온기가 2026년 새해에도 안산의 메타세쿼이아처럼 곧고 푸르게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 우정 출연자 박성기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