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서 만난 제주의 인정, 38년의 질주를 소환하다
제4보루 앞에서 바라본 한강
[아차산에서 만난 제주의 인정, 38년의 질주를 소환하다]
오늘 아차산행은 시작부터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아차산은 제가 오랫동안 가까이해 온 정 든 곳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소 존경하는 제주 분들이 주축이 된 서울제주도민산악회(놀멍 보멍 고르멍)와의 동반 산행이기 때문일 겁니다. 서귀포산악회에서 얼굴을 익힌 지인들과 나란히 걷는 길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산길 곳곳에서 마주친 낯익은 얼굴들과 나누는 반가운 눈인사는 아차산의 가파른 오르막조차 평지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아차산은 높지 않으나 암벽길, 돌길, 너덜길, 평지 길이 차례로 이어져 걷는 재미가 참 각별합니다. 호수같은 한강을 굽어보며 구리부터 강동, 송파, 강남, 서초, 강북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지요. 2000년부터는 새해 해맞이 명소로도 이름을 떨쳐 이제는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 되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정점은 고구려 제4보루 옆에서 펼쳐진 간식 시간이었습니다. 새해부터 산악회장으로 취임한 홍석표 회장님 주변으로 제주 사람들이 마주 보며 앉았습니다. 제주 산악회 깃발을 꽂은 위용은 이곳은 분명 제주도 영토였습니다. 온조가 이곳에 정착하여 백제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에서 백제의 개로왕을 물리치고 삼국의 강자로 부상했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아차산에서 고구려 온달장군을 제압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곳입니다.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각축장을 벌이던 이곳에 제주사람들은 무혈로 입성하여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습니다.
시원한 한강 풍경을 병풍 삼아 집집마다 정성껏 준비해온 제주의 산해진미가 펼쳐졌습니다. 한치, 돼지고기볶음, 과메기, 톳나물, 미역 등 그 넉넉한 상차림속에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척박한 바람을 이겨내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깊고 든든한 인정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서 고향의 맛과 정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 마음은 굽이치는 한강 물결위에서 더욱 풍요로웠습니다. '산색불변 인정자이(山色不變 人情自異). 산빛은 변하지 않으나,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역시 산은 누구와 오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넉넉한 인심을 마주하니 문득 38년 전, '도전과 극복(Challenge and Overcoming)'을 새기며 이 산을 뛰어오르던 제가 떠오릅니다. 단기 4321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당시 서울 패럴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며 단기 연도와 같은 수인 4,321명의 건각이 잠실 주경기장을 출발했습니다. 평화의 문까지 4,321m를 내달렸던 그 역사적인 장면 속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송파마라톤회 선수로서 그 숭고한 질주를 준비하며 새벽마다 아차산의 암릉길과 너덜 길을 박차고 올랐습니다. 제게 아차산은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정복해야 할 거친 벽, '아차(峨嵯)'였습니다.
단기 4321년의 청년은 이제 38년의 세월을 건너와, 제주 지인들이 건네는 음식과 웃음 속에서 아차산과 하나가 됩니다. 수많은 이들의 발길과 마음이 머물렀던 이 산은 이제 더 이상 우뚝 솟은 벽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말인 '아차', 즉 우리 곁의 포근한 '작은 산'이 되어 우리를 안아줍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은 여전하건만, 기록을 위해 달리던 마음이 인정을 나누는 넉넉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차산 높이는 그대로이나 스스로 높이를 낮추어 우리를 맞이해 줍니다. 험준함을 깎아 친근함을 내어준 아차산이 고맙습니다. 오래전의 가쁜 숨소리를 인정으로 채워준 제주산악회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주산악회 회원들
오늘 여러분과 나눈 산행 성찬은 제 인생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완주의 기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