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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 Sara Mar 23. 2023

86년생 동갑내기, 10년 차 부부가 사는 법

사랑한다 말할까


남편과 나는 86년생 호랑이띠 동갑내기다(이렇게 나이를 커밍아웃 하게 되는 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나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오빠를 만나고 싶었던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나이가 같은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 스스럼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로 지내던 우리는 1년 6개월의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앞으로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여보 혹은 자기'라고 부르자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애칭도 자연스러운 10년 차 부부가 되었다.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호랑이띠 여자는 기가 세다고. 호랑이 띠인 여자들이 대체 몇 명인데 그렇게 한꺼번에 싸잡아 말하는 것인가라는 마음이 불뚝불뚝 올라오지만, 또 나를 생각하면 틀린 말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는 남편의 넓은 마음에 반했다. 내가 욱하는 마음에 다다다 쏘아붙여도 남편은 바로 반격하지 않았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한 것엔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할 줄 아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멋졌던 것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늘 그전보다 더 좋았다. 글을 쓰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이 남자의 그런 모습이 내 인생의 모토와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 물론 365일 늘 좋았던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30여 년 가까이 나고 자란 두 사람이 맞춰 가기까지, 누구나 그렇듯 우여곡절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위기 없이 무던하게 10년간 부부생활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공이 크다. 크게 다투고 난 뒤에도, 그 다툼이 서로에 대해 더 배우고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 때문에 원래 약속되어 있었던 일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쭈욱, 나는 집을 돌보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되었다. 세 돌전까지는 무조건 내 손으로,라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고 첫아이를, 또 3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를 양육했다. 그리고 터진 코로나는 세 돌이 훌쩍 넘어 6살이 된 아이도 함께 가정 보육하게 만들었다. 행복하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던 긴 육아의 터널에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남편 덕이었다. 그는 가정에서의 나의 수고와 헌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육아를 위해 내가 포기했던 것들, 그리고 속상한 내 마음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들 돌본다는 핑계로 남편이 뒷전이었지만, 남편은 늘 내가 먼저였다. 코로나로 인한 기나긴 가정 보육에 지쳐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왔을 때, 그래서 '나를 찾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을 때. 누구보다도 날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것도 남편이다. 



그런 남편 덕분에 열심히 책도 읽고, 영어 공부도 하고, 글도 썼다. 온라인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도 했다. 그러는 사이 집안일에 소홀하기도 했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다. 출근하고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도 엉망인 집을 보면서도, 또 쉬지 못하고 바로 아이들과 놀아야 했을 때도 불평하지 않았다. '고작 그거 하면서, 겨우 그거 벌거면서'라는 말은 입 밖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의 지지와 응원 덕에 여기까지 왔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좋은 인연들을 만났다. 이제야 좀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성취욕이 높은 사람인데 너무 꾹꾹 눌러대기만 했구나 싶었다. 다시 찾은 내 시간에, 또 조금씩 나아지는 내 모습에 행복했다. 




어제 남편이 독서모임 오프라인 모임에 다녀왔다. 같이 공부하고, 자기 계발하자는 이야기를 1년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해가 바뀔 때마다 이야기하기를 2년. 맘이 동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던 남편이 드디어 생각을 바꿨다. 협박 반 자의 반으로 참석한 모임에서 남편은 생각 외로 훨씬 열심히 참여했다. 우리 모두 잠자는 시간에 새벽까지 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 그러더니 리더님이 뽑은 서평 잘 쓴 사람 몇 명에 당첨되어 식사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약속 장소가 서울이라, 당연히 안 가겠거니 했는데 가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서울 가는 버스 표를 끊으면서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휴가는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남편의 연차는 늘 아픈 아이들 병원 데려가기, 육아에 지친 부인 힐링 시켜주기, 가족 여행을 위해서만 쓰였다. 육아와 집안일에 지친 엄마뿐 아니라, 직장일과 육아에 지친 아빠에게도 휴가는 필요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뭘 하든 반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남편 덕에 여기까지 왔다. 동갑내기라 서로 지지 않고 싸울까 봐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빠 같은 남편 덕에 우리는 10년을 함께 살아냈다. 스콧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있는 잠재력을 100퍼센트 발휘할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 10년 동안 날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내 잠재력을 100퍼센트 발휘해서 최고의 모습이 되도록 도와준 고마운 남편. 이제 나도 남편이 잠재력을 100퍼센트 발휘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지원해 줘야겠다. 여보, 고맙고 사랑해.... (과연 이 글을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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