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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와동화 Jul 05. 2024

귀를 기울이는 집

김혜진 | 다른 | 232쪽 | 2018년 2월 | 청소년


줄거리      

   

주인공인 담이는 유치원에서 말수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 간 결과 ‘선택적 함구증’ 진단을 받는다. 그 후로 엄마 손에 붙들려서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나아졌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 생일에 초대된 아이들의 뒷말을 듣고 담이는 다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정인후 교수의 자택 기념관에 견학을 간 담이는 우연히 정인후 교수를 만나게 되고 정 교수의 말을 받아 작품을 완성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 집에서 또래인 유주를 만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연다. 유주의 동생 유원, 기념관을 관리하는 해나래와 제학, 식사를 담당하는 양 할머니와 이 집을 설계한 서씨 할아버지 등 신비로운 이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좋다. 

집에 숨긴 비밀은 10년 만에 열린 여름 모임에서 점점 드러나게 된다. 정 교수를 집 밖으로 내쫓고 그 집을 이용해 야망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있다. 담이는 정 교수의 마지막 작품(람이라는 사람과 달팽이 핑이 신기한 열쇠로 문을 열고 벽을 넘어가는 이야기.)이 그 비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정 교수의 친구인 신 박사 가 같은 시기 비슷한 작품을 발표했는데 성공한 정 교수의 것을 신 박사가 표절한 걸로 되어버렸다. 정 교수는 죽기 전 그 비밀을 밝히려 한다. 담이와 유주와 유원은 함께 힘을 모아서 비밀의 방을 찾는다.      


     

책 속 문장들     


선택적 함구증. 이것이 담이에게 주어진 병명이었지만, 담이는 ‘선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안 하길 선택했다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담이는 정말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담이를 배신하는 것이다. 연못 속의 붉고 하얀 잉어들처럼, 분명히 거기 있다는 걸 아는데, 해야 할 때가 되면 말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_18쪽     


“이 벽을 넘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가 묻자 모자 밑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 벽에, 자네의 일부를 두고 가는 것일세.”

“나를 두고 간다고요? 어떻게요?”

“벽이 스스로 자네의 일부를 가져갈 걸세. 벽을 속이려 든다면 자네는 벽 안에 갇히고 말 거야. 자네에게 더 이상 남기고 갈 것이 없다면 벽을 넘지도 못하게 되겠지.”_36쪽     


그때 눈에 ㅊㄱ 이라 적힌 문이 들어왔다. 여기 온 첫날 들어가 길을 잃었던 문이었다. 담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잃으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아서 담이는 세번째 방에서 멈췄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문을 닫자 그 방은 방문 밑으로 새어 들어오는 흐린 불빛 빼고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약간은 위로가 되고, 조금은 더 외롭게 하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담이는 한참을 서 있었다. 말이 차오르고 끓어올라 넘칠 때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담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야!”

“넌 진짜 바보 멍청이야!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담이는 눈앞에 주먹 쥔 손을 대고 흑흑 울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담이는 가끔 이렇게 울었다. 가슴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목까지 차오르면, 울음은 말보다 쉽게 나왔다._42~43쪽     


“음…… 이 사람은 이름이 없나요?”

정 교수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되물었다.

“그러는 넌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정 교수는 담이의 이름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담이라 대답하자 정 교수는 무신경한 태도로 이야기 속 사람 이름을 람이라 했다. 그렇게 대충 이름을 지어도 되는지 담이는 미심쩍었지만 정 교수는 고집스러웠다.

“됐어, 이름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아무리 가볍게 지었어도 곧 의미가 덕지덕지 붙어 무거워지고 말지. 다른 이름으로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너 또한, 이 글을 받아 적는 이로서 권리가 있으니.”_55~56쪽     

“다들, 다들 중요하다고 그러던데요. 교수님의 마지막 작품이고, 되게 의미 있는 거라고…….”

“하! 그 말을 아직도 믿고 있단 말이냐?”

“그럼 거짓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담이가 놀라 묻자 정 교수가 되물었다.

“거짓말? 거짓말이 뭐지?”

“틀린 걸…… 말하는 거요.”

“그럼 맞는 걸 말할 수도 있단 말이냐? 말은 언제나 틀려. 말은 언제나 어긋나지. 모두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 것처럼 말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옳을 거야.”

정말 이상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을 하지 못하는 담이가 차라리 나은 것이다, 아무 말이나 막 하는 애들보다. 하지만 그래도 담이는…….

“……그래도 전 말을 제대로 하고 싶어요.”

담이는 입을 막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뜬금없는 소리를 해 버렸다. 그러나 정 교수는 말꼬투리를 잡지도, 무슨 소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될지언정 말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해야 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진실에 닿을 수도 있을 테니. 그러한 이유로 나 또한 말을 이어 가는 거다.”_64~65쪽     


담이는 가슴이 꽉 막혔다. 엄마는 늘 힘들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 말이 도리어 힘을 빠지게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지금은 엄마가 빨리 방을 나가기만 바랐다._83쪽     


담이와 유주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유주의 예민함과 담이의 소심함은 서로를 찌르기보다는 퍼즐처럼 잘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유주는…… 뭔가 달랐다. 친해졌다고 꼭 같이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계속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장소에서 각자 말 한 마디 없이 책을 봐도 괜찮았다._87쪽      


“언제나 나를 둘러싼 벽들 때문에 괴로워했지. 벽을 넘고 나서 새 인생이 펼쳐지길 기대했어. 하지만 그 벽들이 바로 내 인생이었어. 벽을 넘어가는 순간들이 내 삶인 거야. 이제 이야기를 붙일 게시판도 없지만 이걸 말하고 싶었어.”

담이는 그 말을 곱씹어 봤다. 말만 편하게 할 수 있으면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다. 딱 알맞은 말을 찾으면 쉽게 문을 열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문을 애써 열 필요가 없었던 걸까. 그 괴롭고 답답한 순간들이 이미 담이의 인생이었던 걸까.

“예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

“예전에, 예전에? 네가 더 어렸을 때 말이냐? 맙소사! 몇 살이라 했지? 열세 살? 열네 살? 지금도 충분히 일러! 아직 한참 몰라도 된다고!”

…………

“하긴…… 그 십 몇 년이 네게는 평생이니까.”_226~227쪽     


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우습고 즐거웠다. 날아오를 듯한. 아주 가벼워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렇게 많은 벽을 넘고 난 다음에야 느껴지는…… 풀려난 기분._229쪽       


   

그 외 생각들     


이렇게 신비로운 집을 지은 서씨 할아버지를 좀더 매력적으로 그려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속에 있는 것을 실현해낸다는 것도 예술 아닌가. 소리가 모이는 방이라니!     


서씨 할아버지는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만들었지. 정 교수님의 뜻에 따라서. 그 집은 내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품이었어.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것을 끄집어내어 현실로 만들었을 때…… 그때의 환희는 누구도 알지 못할 고다. 그건 그렇게 폄하될 게 아니었어.”_218쪽     


“게시판의 유리를 깬 건 나다.”

담이는 깜짝 놀랐다. 역시 그랬구나.

“쪽지를 읽고 정 교수님이 그 방을 밝히려 한다는 걸 깨달았어. 충동적으로 손이 나갔어. 그건, 우리의 비밀이었으니까. 비밀이 밝혀지고 집이 난도질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으니까.”_219쪽


(불쑥 아이에게 고백이라니?)     


숨겨지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이 집이 표절, 도덕적 잣대 때문에 아름답지 않은 공간이 되고 말았다. 소설 속에서 불타버린 것도 아쉽다. 정 교수의 욕망을 더 치열하게 그려주었다면 불타는 걸 받아들이기가 조금 덜 불편했을까.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그리되었고...심지어 그 공간마저 무슨 죄악의 온상처럼 분위기를 만들고(삶을 회피한 사람 같다.)  태워버려서 그 집의 신비로움이 지켜졌으면 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집도 나름 생명이 있을 텐데, 정 교수란 사람도 그렇고 집이 도구로 사용된 느낌이다.     


말 없는 애가 주인공이라 조금 답답하긴 하다. 그래서 그토록 씩씩한 주인공들이 멋진 캐릭터라며 치켜세워지는 거겠지.      


세밀하게 묘사된 담이의 마음, 미로 같은 공간들. 초성으로 이루어진 문 덕분에 무한히 피어나는 상상력, 신비로운 집을 판타지 세계인 듯 매력적으로 만든 점, 사이사이 끼어든 문의 상징성을 지닌 또다른 이야기 등은 작가가 공들여 쓴 느낌이다. 

진실과 거짓. 말 하는 것과 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한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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