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관중의 인생(1919~2010)
주부1의 정보 제공으로 씌여진 글이라 주부1의 시각으로 글이 진행되었어요.
중국 장쑤성에서 태어난 우관중은 원래는 공학도였다. 그러다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만나 그 매력에 빠지고, 미술로 전향한다. 미술학교 항저우예전을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전국에서 단 한 명뿐인 국비생)을 떠나 3년 여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민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 중앙미술학원의 강사가 되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지만 여기까지는 그의 삶이 그림을 시작하고는 그런대로 평탄해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 세력들은 우관중의 그림을 곱게 보지 않았다. '공농병 계급을 추하게 묘사한' 형식주의 예술로 평가하였다. 그는 계급적 시각으로 보는 인물화를 피하고 풍경화에 주력했다. 직접 본 풍경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그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우관중은 베이징예술학원이 해체되고 중앙공예미술학원(현 칭화대 미술대학)으로 옮겼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우관중은 농촌으로 보내졌다.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간염이 심했다. 마오쩌뚱 시대에는 하나의 태양(마오쩌뚱)과 한 가지 꽃, 즉 해바라기(인민)만 그려야 했다. 우관중은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자기 그림을 불태웠다. 창작 금지령이 내리고 재교육 대상이 되어 병든 몸으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극심한 치질까지 앓아 걷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때서야 조금 가벼운 일터로 옮겨졌다.
몇 년 후 창작 금지령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병은 낫지 않았고 그는 차라리 '그림으로 죽으리라' 하며 그림에 몰두했다. 분뇨 지게를 이젤로 삼아 풍경화를 그렸다. 처가가 있는 구이양에서 서서히 건강이 나아졌다.
1978년 마오쩌둥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관중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79년, 베이징의 중국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현재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화가들은 우관중이 자신들의 예술적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삶이 온전히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놀랍다. 본받고 싶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재능을 타고난데다 그토록 열심히 했으니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니 나같이 그림을 모르던 사람의 눈에도 띄었겠지...
따라 그린다고 그 정신까지 그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리는 동안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