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 롤 모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지방의 어는 백화점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던 그녀를 나도 모르게 뒤돌아 보았다. 염색기 없이 윤기가 흐르던 긴 머리, 검은색 아방한 실크 스커트에 코랄빛 캐시미어 니트가 쇄골이 보일 듯 말 듯 늘어지게 걸쳐진 모습이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역시 캐시미어 인가? 여리한 실루엣이 과하지 않게 적당히 드러난 모습이 예뻤다.
같은 여자가 봐도 그녀는 꽤 매력 있었다.
나는 당시 영업부 md팀 소속의 장기계약직으로 그날은 전단지에 실릴 상품을 가지러 가는 중이었다.
단순하지만 소중한 나의 일을 수행하러 조명에 반짝이는 백화점 대리석을 즈려밟고 가던 찰나에 그녀를 보고 단숨에 그녀와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익숙한 명찰이 그녀가 이 백화점 어딘가의 판매사원 일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옷의 소재나 디자인에 관심이 많고 그것들이 조화롭게 매치되었을 때의 느낌을 좋아하는데, 주관적이지만 그날 그녀의 느낌이 좋았다.
백화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힘을 한껏 준 꾸꾸 스타일이 아닌 힘을 빼고 과하지 않아 매력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당시 백화점에서 매출 탑을 찍는 브랜드의 샵 마스터였다.
나는 괜히 그 브랜드 앞을 지나다가 인사를 하고 기회가 생기면 괜한 말을 걸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이제부터 는 그녀를 h라 부르겠다.
h는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사정에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그중 페이가 좋았던 의류판매 아르바이트를 가장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졸업 후 h가 전공을 고려하지 않고 백화점 샵 마스터가 된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는 대목이지만, 굳이 설명을 하자면 샵 마스터가 잘만하면 고수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h에겐 부모님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h가 초등학교 시절에 혈압으로 쓰러지면서 중증 장애를 앓게 되었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곁을 20년 가까이 지키고 계셨으며, 3살 터울 여동생은 30살임에도 늦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집의 가장으로 살아야 했던 h의 퇴근 모습은 근무때와는 사뭇 달랐다. 머리는 노란색 고무줄로 질끈 올려 묶고 그녀의 매장에 걸린 고급 옷들과는 다른 늘 저가 브랜드 상품의 뉴트럴톤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마치 평범한 아르바이트생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h의 예쁘장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h의 꾸밈없는 담백한 모습에 나는 h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어느샌가 나의 롤 모델로 상정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제법 친해진 h와 나는 퇴근 후에 한 번씩 와인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은 본인 부주의로 올이 나간 니트와 강남에서 잘 만들어 준 것 같은 코를 같이 들이밀며 따지는 진상고객 이야기를, 어느 날은 나에게 단순하지만 소중한 일을 지시하며 어깨에 떨어진 비듬을 털어내던 김대리 이야기를 안주 삼았다.
당시 백화점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엔 활성화 오른쪽엔 비활성화된 거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주로 비활성화 거리에 있는 가성비 좋은 와인바에 자주 갔었다.
맛의 좋고 나쁨을 잘 모르던 우리는 싼 맛에 마시는 와인도 부족함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이따금씩 h는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의 디스플레이가 막히거나 요즘 트렌드가 잘 읽히지 않는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내가 패션에 관심도 많고 관찰력도 꽤 좋은 편이었기에 h는 내 의견 듣기를 좋아했다.
그럴 때면 h는 너는 정말 패션에 재능이 있으니 회사를 그만두고 옷가게를 해보라고 권유했었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가 옷가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