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밤의 천국
‘밤의 천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한밤의 클럽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밤의 천국은 그런 도시의 밤이 아니다. 우리 선산 깊숙한 산속, 떨어지는 알밤이 발끝에 지천으로 깔린 그곳이야말로 진짜 ‘밤의 천국’이다.
아들과 함께 산에 들어서자, 발자국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밤이 밟힌다. 아직 아무 손도 타지 않은 신선한 밤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주워 담는 동안에도 ‘툭, 툭’ 소리를 내며 밤송이와 알밤들이 계속 떨어진다.
처음엔 크고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주워 담다가 점점 허리가 아파오자 아들에게 작은 밤은 패스하자며 ‘선 긋기’를 했다.
깊은 골짜기로 물길이 모이는 곳에는 밤들이 반상회라도 연 듯이 모여 있다. 몇십 개씩 한데 모여 있는 걸 보면 집게는 옆에 두고 양손으로 주워 담는다. 그런데 그때부터 검은 모기떼가 나타난다. 마치 이 밤들을 지키겠다는 듯 철통 방어선을 치고 달려든다.
가을비가 내리고, 농약 한 번 뿌리지 않은 천연의 숲이니 이곳은 모기의 천국이기도 하다.
잠시 거리를 두고 숨을 고른 뒤 방어태세를 갖춘다. 손수건으로 입과 목을 감싸고, 모자를 눌러쓰고, 후드를 덮어쓴다. 그래도 빈틈을 어찌 알고 파고드는지 귀 밑, 턱 밑이 허점이다. 결국은 몇 방 물리고 나서야 인사치레한다. 그래도 뱀이나 멧돼지를 만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이틀에 걸쳐 비와 땀에 젖어 주워온 밤이 다섯 포대다. 아들은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묵묵히 따라주고, 무거운 포대를 나르는 일은 도맡아 한다. 덕분에 일은 훨씬 수월했다. 내일 다시 가면 두세 포대는 더 주울 수 있을 듯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첫날에도 놀라고, 둘째 날에도 놀라신다. “예전엔 밤나무가 많아서 수확만 잘해도 큰돈이 됐지.” 아버지는 회상하신다.
옛날엔 과일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나 보다.
제사상 과일 순서가 '조율시이'로 나가는 것을 보면 대추 다음으로 밤이 두 번째이다. 그만큼 밤이 존경받고 귀한 과일이었던 게 분명하다.
세월이 흘러 밤나무들이 늙어 베어내고 소나무를 심었지만, 그 사이 자생한 어린 밤나무들이 이제 훌쩍 자라 다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임도 옆에 떨어진 밤만 주워오다가
작년에 산속 골짜기에 밤이 많다는 걸 알고 밤 줍기를 시작했는데, 올해가 두 번째다.
그전엔 아무나 주워 갔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올해도 또 올 것이다.
아버지는 옛 생각이 나셨는지 “이거 시장에 내다 팔아봐라.” 하신다. 하지만 나는 형제들과 오는 손님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나누고 싶다.
거실에는 포대째 펼쳐 놓은 밤이 가득하고, 벌레 먹은 것을 하나씩 골라낸다. 큰 구멍은 금세 눈에 띄지만, 바늘구멍처럼 작은 것은 여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도 옆에 앉아 함께 벌레구멍을 살핀다.
벌레들도 나름의 생존 본능으로 밤껍데기에 붙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간다. 드론을 이용하여 살충제를 살포할 수 있다면 때깔 좋은 밤을 훨씬 많이 수확할 텐데, 여건이 되지 않으니 그저 떨어지는 밤을 주워 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밤 줍기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머릿속은 여전히 산속이다. 천장 위로 크고 작은 밤알들이 바둑알처럼 흩뿌려지고, 손끝으로 그것들을 주워 담는 연상을 하다 잠이 든다.
내년에도 더 많이 주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장에 내다 팔까, 아니면 ‘채소마켓’이라도 이용해 볼까.
가을 밤의 천국은 그렇게, 모기의 천국이자 벌레의 천국이며, 동시에 내 마음의 천국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