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51. 곶감이야기

by 큰나무

곶감 이야기

어릴 적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감을 따러 다니곤 했다. 윗동네에도, 뒷산에도, 그리고 우리 집 울안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가을이면 감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린 감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감이 많이 열리면, 그 시절에는 나무에 달린 채로 감을 통째로 파는 경우도 있었다. 가을에 감만 따가는 조건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감값이 좋게 팔리면 집안 분위기도 덩달아 환해졌다.


어린 나는 감을 따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작은 보조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감전지로 감을 따면, 나는 그 감을 전지에서 빼내 상자에 담았다. 해가 기울어갈 때까지 이어지는 감 따기 일은 지루하고 끝이 없어 보였지만, 배가 고파질 즈음이면 새빨갛게 익은 피홍시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붉은 태양빛을 받아 자연스럽게 익은 그 홍시는 세상 어떤 과자보다도 달고 맛있었다.


감 따기가 끝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밤새 곶감을 만들기 위해 껍질을 깎았다. 이른 아침 양지바른 처마 밑에 새끼줄을 걸고, 껍질을 벗긴 감을 하나하나 꿰어 매달았고 감껍질은 채반에 널어 말리면 우리에게 겨울 간식에 안성맞춤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감은 쪼글쪼글하게 말라갔고, 하교 후 살짝 빼먹는 그 곶감의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꿀맛이었다. 어머니는 누가 빼먹는지 다 아셨을 테지만, 모르는 척 눈감아 주시곤 했다.


곶감이 적당히 말라지면 백 개가 한 접이다. 장날이면 어머니는 곶감을 가져가 팔고, 그 돈으로 생활용품도 양말도 사고 고무신도 사 오셨다.


하지만 전부 팔지는 않았다. 집안 제사상에 올리고, 식혜나 수정과, 보름날 찰밥에도 넣을 곶감은 소쿠리에 담아 시렁에 올려 겨울바람에 더 곱게 말려 두었다.


해마다 반복되던 곶감 만들기는 우리 집 가을의 풍경이자, 빼놓을 수 없는 농사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상강에 감을 따야 곶감을 깎지.”

그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땐 그 뜻을 잘 몰랐다. 상강은 한로와 입동 사이, 대략 양력 10월 23일 무렵으로, 서리가 내리는 절기이다. 가을의 마지막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시기다.


하지만 올해는 이상하게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기온이 높고 가을비가 잦아 감들도 제철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감 따야지, 곶감 깎아야지.” 하시며 나를 재촉하셨다.


본가에 내려가 보니 대문 옆 단감나무에 감이 유난히 많이 열려 있었다. 지난 6월 아버지 생신 때 매제가 감이 떨어지지 말라고 약을 꼼꼼히 뿌려준 덕분이었다.


아직은 덜 익었지만, 아버지 성화에 나는 사다리를 놓고 담장에 올라 샛노란 감부터 따기 시작하셨다. 금세 한 접, 두 접이 쌓였다.


저녁식사 후, 아버지는 허리를 삐뚤고 등은 굽었는데도 감을 깎으러 앉으셨다. 몸은 불편해도 손끝의 감각만큼은 여전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예전처럼 나란히 앉아 감을 깎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깎은 감들은 이른 아침 2층 옥상 빨래걸이에 매달렸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년엔 해갈이라 감이 많이 안 열릴 게야. 이번에 깎은 곶감으로 두 해는 써야겠다.”


그 말에, 아버지의 작은 소원 하나를 이뤄드린 셈이었다.

내 몸이 조금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아직도 달고 따뜻한 곶감 같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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