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감이 떨어지듯
가을 햇살아래 노랗게 분칠 한 감이 이제는 분홍빛을 더해 윤기가 나고 탐스럽다.
볼록하고 통통해진 감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넉넉하고 푸근하다.
한 해의 결실이 가지 끝에서 달콤하게 익어가는 시간,
그 안에는 수많은 바람과 비, 태풍을 견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올해는 상강이 지난 10월 23일부터 감을 따기 시작했다. 아무리 늦어도 11월 10일까지는 모두 따야겠다.
뒤늦게 딴 감일수록 씨알이 굵고 단맛이 더해져 그 풍미가 깊어진다.
그러나 시장에 진열된 감들을 보면, 푸르스름한 얼굴로 아직 덜 익은 채 팔리고 있다.
감은 적절한 때에 따야 그 맛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서둘러 따낸 감은 그저 ‘감 모양’을 한 과일일 뿐이다.
팔아야 하는 이들의 사정은 이해되지만, 자연의 시간보다 앞서간다는 것은 결국 맛을 잃는 일이다.
요즘 들어 감 따는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일까. 예년 같으면 10월 초부터 따기 시작해 10월 말이면 다 끝나던 일이,
이제는 보름이나 늦어졌다. 상강이 지나도 서리가 내리지 않고, 기온은 여전히 높다.
감이 채 여물기도 전에 물러 떨어지고, 저장해 둔 감은 홍시가 되기도 전에 골아 터져버린다.
감도 더 이상 계절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감이 떨어졌다’는 말은 우리 삶에도 자주 쓰인다.
예상이나 느낌이 어긋났을 때, 하던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감이 떨어졌다”라고 말한다. 흥이 식고, 의욕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여러 번 떨어지며 익어간다.
봄에 핀 감꽃들은 꿀벌의 손짓이 닷기도 전에 떨어지고, 덜 익은 땡감은 여름 장마에, 가을 태풍에도 떨어지고, 벌레 먹은 감도 떨어진다.
감은 그렇게 자연의 이치 속에 순응하며 끝까지 매달려 남은 것은 튼실하게 커지고 제 몫을 다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땡감 떨어지듯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떤 이는 홍시처럼 다 익어 간다.
평균수명보다 일찍 떠나는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그 또한 자연의 섭리 속 한 조각일 뿐이다.
감이 떨어지듯, 사람도 언젠가는 떠난다.
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감을 바라본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언젠가 제 자리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연스레 익어가는 그 모습을.
나 또한 그렇게 자연 스러이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