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산림욕장둘레길에서
다음 주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는 예보를 들었다.
이대로 가을을 보내기엔 아쉬워, 늦기 전에 마지막 가을 풍경을 즐기고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두유 한 팩, 떡 한 조각, 물 한 병을 어깨에 세로로 멘 가방에 챙겨 넣고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몇 정거장만 지나면 대공원역이다.
평일인데도 대공원 앞은 늦가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멀리 청계산 자락을 감싸 안은 대공원은 걷는 코스가 여러 갈래다. 대공원 둘레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약 90분 정도, 산림욕장 둘레길은 150분쯤 걸린다. 언젠가 꼭 한 번 걸어보리라 마음먹었던 길, 오늘은 그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혼자 걷는 길은 생각보다 좋다.
누구의 눈치도, 속도도 신경 쓸 것 없이 내 걸음으로 걷는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내 걸음에 맞춰 흘러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가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잎, 다갈색 떡갈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가끔 낙엽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혹시나 들쥐가 먹이를 찾는 소리인가 싶다. 문득 나도 시장기를 느껴 떡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길 도중에는 ‘선녀못이 있는 숲’, ‘얼음골 숲’, ‘생각하는 숲’, ‘쉬어가는 숲’, ‘원앙이 숲’ 같은 이름표가 붙은 쉼터들이 있다. 그 이름만으로도 걷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봄부터 여름을 넘기며 한결같이 푸르름을 지켜온 나뭇잎들은 이제 저마다의 생을 마무리한다. 뜨거운 햇살과 거센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낸 나무들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낙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보다 더 자연에 순응하며 버텨온 시간, 그 속의 고요한 강인함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바람에 시원스레 날린다.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스쳐가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내년 봄을 기대한다.
더 생동감 있고 활력 있는 시간으로 다시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