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야기

42. 조부제사와 내리사랑

by 큰나무

내 휴대전화의 벨이 울린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두 글자가 떠 있다.


“예, 아버지.”

차노냐?”

“예.”

“내일 할아버지 기일이니 네가 다녀오너라.”

“예, 제가 다녀올게요.”

“가면 네 이름으로 봉투 하나 해서 주고 와라.”

“예, 그럴게요.”


아버지는 늘 그렇듯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신다.

내 대답을 들으셨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큰집 형님이 절에서 조부모 제사를 모시기에 당연히 참석할 거라 이미 알고 계시니까.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조상님의 기일을 제대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늦가을이 시작될 무렵부터 할아버지 기일을 잊지 말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다른 일에는 느긋하셔도 조상 모시는 일만큼은 한 번도 허투루 넘긴 적이 없다.

아버지는 지금도 당신의 할아버지,

내게는 증조부의 기일까지 챙기신다.

큰할아버지의 장손인 재종형님이 제사를 모시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증조부 제사를 지내 오셨다.


“내 제사는 꼭 네가 지내라.”

증조부께서 생전에 하신 이 말씀을

아버지는 평생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신다.

대신 그 빈자리를 증조부의 사랑으로 채우셨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증조부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그 기억 때문일까.

아버지는 이제 당신의 손자에게

그 사랑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계신다.


내가 혼자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가장 먼저 묻는 것도 결국 손자 이야기다.

감기는 안 걸렸는지,

밥은 제때 잘 먹는지,

용돈은 충분한지.


손자가 혼자 본가에 방문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얼굴빛부터 달라진다.

엔도르핀이 솟는지 혈색이 좋아지고,

옷도 유난히 말끔한 것으로 갈아입으신다.

“미리 통장에서 돈 좀 찾아와라.”

며칠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돈을 손자 손에 쥐여 주며 배곯지 말고 학교다니라고 하신다.


학생 시절 배고픔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버지는 그 기억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계신다.


다른 외손자들이 보면 질투가 날 만큼

아버지의 친손자 사랑은 각별하다.

하지만 그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버지가 증조부로부터 물려받으신 것처럼 손자가 만 스무 살이 되자

선산을 손자 앞으로 증여해 주셨고,

등록금 낼 때가 되면 등록금도 당연하다는 듯 내미신다.


그리고 또 한마디.

“내 제사는 네가 꼭 지내라.”

증조부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손자에게 같은 말을 남긴다.


요즘 세상에

손자가 제사를 제대로 모실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시대는 변했고,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도 계속 달라지고 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답을 알 수는 없다.


옆에 계신 어머니는

손자에게 이런 농담 섞인 당부도 하신다.

“여자친구 사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 계신다고는 말도 하지 마라.

조부모까지 살아 계시면

여자친구도 못 사귄다더라.”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할 것이다.

제사의 방식도, 가족의 형태도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말없이 이어지는 내리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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