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66. 감자꽃을 기다리며

by 큰나무


한적한 시냇가 둑방길에 서니, 따스한 바람이 산모퉁이를 돌아와 몸을 스친다. 겨드랑이 사이로 스며드는 이 바람은 낯설지 않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남아 있던, 고향의 봄이다.


매화는 어느새 꽃망울을 터뜨려 반짝이고, 마른 풀숲 사이에서는 이름 모를 새싹들이 고개를 든다. 성급한 마음을 닮았는지, 병아리 부리 같은 작은 꽃들도 먼저 피어나고 있다. 봄은 이미 멀리서 오는 계절이 아니라, 내 발밑에 와 있었다.


일백 평 남짓한 밭은 몇 년 동안 누나와 매형의 몫이었다. 갈고, 심고, 거두는 일이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로, 올해는 몇 그루 나무만 심고 쉬자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괜히 큰소리를 쳤다. “내가 할게.” 그 말 한마디가 큰일을 냈다.


동네 아저씨에게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 달라 부탁했었는데 이미 잘해놓았다, 이제 검정 비닐을 씌울 생각을 하니 하루는 족히 걸릴 듯했다. 그런데 감자농사를 크게 짓는 친구가 근체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와 감자를 심고 있었는데 그중 둘을 보내주었다.


함께 비닐을 씌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젊은이들이었다. 한국에 온 지 7년, 서툴지만 우리말을 제법 잘한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있다는 말에, 세월의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모국어에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까지 네 가지 언어를 한다고 했다.

4개 국어에 낯선 땅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들의 성실함이 은근히 부러웠다.

덕분에 한 시간 반 만에 비닐 씌우는 일을 마쳤다. 혼자였다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했을 일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특히 친구의 마음씀도 감사하고.


누나와 함께 준비해 간 씨감자를 호미로 구멍을 내어 하나씩 눌러 심었다. 네 이랑이 금세 채워졌다. 흙 속에 묻힌 작은 감자들이 깊은 꿈을 꾸며 새싹을 피워내고 잘 자라 세 달쯤 지나 하지 무렵이 되면, 감자꽃이 하얗게 피어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꽃 아래에는 토실토실한 감자들이 주먹만 하게 매달려 있겠지.


나머지 이랑에는 고추도 심고 가지도 심고 여주도 심고 또 또 ...


밭 가장자리에는 풀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더 덮었다. 풀과의 싸움은 시작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옆 자투리 땅에는 전날 친구에게 얻어온 두릅나무와 엄나무 묘목을 심었다. 잘라온 뿌리는 서른 개 남짓을 시험 삼아 밭과 산에 나누어 묻었다. 올해 잘 살아남는다면, 내년 봄에는 조금 더 넓게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다.


대추나무 한 그루와 감나무 두 그루의 가지를 치고, 삽과 톱을 번갈아 들었던 하루. 온몸이 나른하게 풀린다.


내일은 마을 입구 작은 밭을 뒤집어 이랑을 만들고, 다시 비닐을 씌울 것이다. 오래 비어 있던 집의 마당도 정리하고 뒷곁에 풀을 뽑고, 제초제도 뿌려야 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하지만, 들여다보면 한시도 쉴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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