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마음이 취한 봄날
2026.03.28.
취하고 싶었다.
아니, 술잔을 비우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봄에 취해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봄맞이 길이었다. 아직은 이른 봄쯤으로 여겼는데, 쌍계사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생각은 금세 빗나갔다.
길 양옆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하룻밤 사이 세상 위에 연분홍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이미 벚꽃 구경을 온 차량들은 길게 줄을 이루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봄물처럼 넘실거려 내 마음도 들떴다.
화개장터에 들렀을 때는 봄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벚꽃이 필 때만 맛볼 수 있다는 주먹만 한 벚굴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다의 향과 봄의 기운이 한데 섞여 입안 가득 퍼졌다. 7년전에 그 집이다.
'이 맛이 봄맛이야'하며 웃던 그 순간은, 지금도 미소가 번진다.
장터 한 가운데에 기타를 든 조영남 동상 옆에 나란히 앉아 사진 한 장도 남겼다.
19년도에 찍은 사진과 똑같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다음 발길은 순천만국가정원으로 이어졌다. 정원에 들어서자 튤립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이름조차 다 알지 못한 꽃들이 세상을 가득 메웠고 각자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이어 찾은 낙안읍성은 또 다른 봄의 얼굴이다.
벚꽃길과 꽃정원의 화사함이 봄의 들뜸이었다면, 읍성의 고요함은 봄의 깊이였다.
흙담길과 오래된 초가지붕들 사이로 흐르던 시간은 느리고 단정했다. 그 안에서 들려온 판소리 한 자락은 마음속 오래된 감정을 툭 건드렸다.
흥겨우면서도 어딘가 짠한 우리 소리의 결은, 지나온 세월과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어루만지는 듯했다.
여행의 마지막은 도토리묵 전문점이다.
투박하고 소박할 것만 같던 묵요리는 뜻밖에도 정갈하고 화려한 한 상으로 펼쳐졌다. 눈이 먼저 즐겁고, 입이 뒤이어 감탄했다. 코스요리로 봄채소가 곁드려진 묵 한 점, 묵탕수, 따뜻한 묵국,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이 버무려진 만찬이 근사했다.
어느새 어둠은 천천히 해를 삼키고 있었다.
낮의 화사함은 저물어 갔지만, 함께한 친구들과의 시간은 오래오래 기억될것이다.
나는 취하지 않았지만
벚꽃에 취했고, 봄바람에 취했고, 친구들의 웃음에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