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68. 세월을 품어온 질긴 항아리

by 큰나무


고향집에 가면 쓸쓸한 빈집이 나를 맞이한다.

사람의 기척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토방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잡초 한 포기조차 정겹다. 구석구석 켜켜이 내려앉은 하얀 먼지마저도 모두 내 어린 시절의 흔적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무엇 하나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삐거덕거리는 창고 문을 열어보면 오래 쌓아둔 상자들과 농기구들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사랑방 창호지는 삭풍에 닳아 사라졌고, 네모난 문살 사이로는 바람이 드나들며 쥐들의 천국이 되어 있다. 책상 위 책꽂이에는 전과사전과 막냇동생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이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그 낡은 책들 속에는, 한때 이 집이 얼마나 북적이고 따뜻했는지가 조용히 남아 있다.


부엌문은 토방 앞으로 반쯤 기울어져 있어 언제 쓰러질지 몰라 떼어내 안으로 들여놓았다. 뒤꼍으로 돌아가 보니 돌절구와 학독은 금이 가고 깨져 있었다. 아궁이의 무쇠솥도 녹이 슬어 마치 휴지조각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집 안의 많은 것들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목높이만큼 큰 항아리와 장독대만은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여전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비바람을 맞고, 눈과 서리를 이겨내며,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모습이 마치 한 집안의 역사를 품은 노인 같았다. 다른 것들은 낡고 허물어져도, 항아리는 끝내 형태를 잃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궁이의 무쇠솥조차 녹슬어 주저앉았는데, 항아리는 어떻게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TV에서 진품명품을 보다 보면 청자와 백자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 뒤꼍의 장항아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한 집안의 손맛과 기다림, 그리고 삶의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간장과 고추장 맛만 보아도 그 집안의 음식 솜씨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집 장맛도, 우리 집 밥상의 역사도, 어쩌면 바로 이 항아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흔넷이 되신 어머니는 올해도 소도시의 단독주택에서 메주를 만들고 띄워 장을 담그셨다. 양지바른 곳에 항아리를 두고 햇볕을 오롯이 받게 하며, 시간을 들여 장을 익히신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사람들은 이제 장도 쉽게 사 먹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 오래된 방식을 놓지 않으신다.


생각해 보면 질긴 것은 항아리만이 아니다.

수십 년 세월에도 깨지지 않고 버텨온 것은 어머니의 손맛이었고, 한 집안을 지탱해 온 삶의 방식이었으며, 끝내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힘이었다.

고향집은 비록 쓸쓸한 빈집이 되었지만,

뒤꼍의 항아리는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항아리를 쉽게 버릴 수 없다.

그 안에는 장맛보다 더 깊은 것,

곧 우리 가족의 시간과 어머니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오늘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