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야기

47.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by 큰나무

휴게소에 들러 전화를 드렸다.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할 거예요.'


전화를 안 하면 안 한다고 걱정하시고, 전화를 하면 그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신다.


구십 넘은 노모가 육십 넘은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한다더니, 꼭 우리 부모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종종 전화를 하지 않고 간다.

어느 날에 내려간다는 말은 미리 해두지만, 몇 시에 도착하겠다는 말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알고 계시면 부모님의 기다림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내가 곹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마당 의자에 앉아 기다리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괜스레 미안함이 먼저 밀려왔다. 날씨도 쌀쌀한데,


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 먹으라며 어머니는 새로 밥을 짓고 국도 끓여 놓으신다.

자식이 이미 늙어가고 있는데도 부모에게 자식은 늘 밥 챙겨야 하는 아이인 모양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아버지 코에 휴지가 꽂혀 있었다.

코피가 난다고 하셨다. 요즘 며칠째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노인의 경우 코 안 점막이 얇아져서 그럴 수도 있고, 혈압이나 오랜 약 복용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혈압약은 꾸준히 드시고 계시니 아주 낯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코피를 닦고 계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약해지신 듯했다.

'이제는 정말 갈 때가 된 것 같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언젠가는 올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주무세요” 인사를 드린 뒤 작은방에 들어와 누웠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렸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가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내 방문을 여셨다.

'조금 얘기 좀 하자.'

방 안으로 들어오신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다시 한번 '이제 내가 갈 때가 된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으셨다.

'그 뒤 일을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닥치면 다 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장례 절차나 형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떠난 뒤 남겨질 자식들 사이가 혹시라도 틀어질까, 그게 더 걱정이셨을 것이다.

'논밭 조금 있는 것 가지고 자식들끼리 싸우면 안 되는데…'


말속에는 오래된 생각의 불안이 숨겨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 세대는 아들 위주, 그중에서도 장남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살아오셨다. 그러니 걱정이 없을 수 없다.


마침 나는 요즘 증여와 상속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있다.

매주 두 시간씩, 6주 과정이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상속 분쟁으로 소송까지 가는 경우의 80%가 거액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1억 원 이하의 문제로도 가족은 법정까지 간다고 했다.


'우리 형제만은 안 그럴 거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장례식장에서부터 다툼이 시작된다고 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 해결할게요.'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시더니

'그래, 원만히 해야지.'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한마디를 듣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이런 이야기는

정신이 온전할 때,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아직은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대화다.


사람은 늘 죽음을 먼 일처럼 미뤄두고 산다.

부모도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유언처럼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


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고, 자식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은 평범한 듯 흘러가지만, 지나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결국 재산이 아니라 자식들이

싸우지 말고 의좋게 잘 살아달라는 평범한 진리를 말씀하신건 아닐까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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