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31. 감자꽃 추억

by 큰나무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떠오른다. 햇살 좋은 날 밭머리에서 꽃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그 작은 꽃 속에 담긴 이야기들.


감자꽃은 겉보기에 참 소박하다. 그런데 그 감자꽃을 보며 독립운동가이자 항일시인 권태응은 한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어릴 적에는 단순한 동요처럼 들렸지만, 알고 보니 이 시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에 반발하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고,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이 될 수 없다."

감자꽃의 색을 빌려 민족의 정체성을 노래한 시였다.

하얀 감자꽃은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어릴 적, 여름이 시작될 무렵 하얀 감자꽃이 피면 곧 감자를 캘 수 있다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감자줄기 밑을 살짝 파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감자가 꽤 자랐다는 판단이 들면 뒷마당에 솥단지를 걸고 논에서 보리타작 후 막 가져온 거친 보리대를 쏘시개 삼아 불을 지폈다.


냇가에서 씻어온 감자를 솥에 넣고 찌면, 감자는 김 서림을 헤치며 토실토실한 얼굴을 내밀었다. 솔바람 부는 뒷마루에 앉아 고추장이나 소금에 찍어 개눈 감추듯 먹던 그 찐 감자의 맛은 지금도 생생하다.


밥때가 되면 감자를 넣어 감자밥을 지어먹었다. 한여름 한 끼 식사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요즘은 감자꽃이 피기 전 꽃을 미리 따낸다고 한다. 감자가 형성되는 시기라 영양분이 꽃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튼실한 감자를 얻기 위해서란다.

한편으론 아쉽다. 소박한 감자꽃이 밭에서 사라지는 것이.


한여름의 시작, 지금이 바로 감자 수확의 계절이다.

지방마다 시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새벽녘부터 밭에 나서야 강렬한 햇볕을 피할 수 있다.


누나와 어머니가 봄에 정성껏 심어놓은 감자가 8이랑. 한 이랑에 두 포대가량 수확된다.


이제는 연로하시어 잘 걷지도 못하시는 어머니지만, “호미질은 할 수 있다”며 감자를 캐고 난 자리에는 연이어 들깨 모종을 심으신다.


가을이 되면 들기름을 짜 자식들에게 한 병씩 나누어 주고 싶으시단다.

어머니가 캐 놓은 감자를 포대에 담으며, 나는 문득 멈춰 선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의 손길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작아지는 내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의 크고 깊은 사랑이 다시금 가슴을 저민다.

감자꽃은 참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피고 또 지고 있었다.


비가 오고 구름 낀 오늘은 감자양파 깻잎을 버무린 감자전을 해 먹어야겠다.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이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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