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야기

32. 불 꺼라

by 큰나무

어릴 적 나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석유를 등잔에 부어 심지에 불을 붙이면 희미하지만 따뜻한 불빛이 번졌다. 지금 생각하면 한석봉이 밤마다 붓글씨를 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 뒤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충전한 배터리로 전기불을 켰다. 배터리를 충전하면 길어야 사흘, 나흘 정도 쓸 수 있었다.


아랫마을에는 우리보다 몇 해 먼저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 집들의 환한 전등불을 바라볼 때마다 부러움과 동경이 밀려왔다.


우리 집은 불을 절약해야 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나는 무거운 배터리를 등에 지고 20~30분 거리의 아랫마을 충전소까지 논두렁길을 걸어갔다. 그 집에서는 순서대로 돈을 받고 충전을 해주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다음 날에야 찾아올 수 있었다. 형제가 많은 집은 돌아가며 이 일을 했지만, 우리 집은 아들이 나 혼자였기에 언제나 내 몫이었다. 힘들었지만, 그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초저녁부터 곧장 불을 켤 수는 없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나서야 등을 켰고, 사람이 없는 방의 불은 반드시 꺼야 했다. 불을 아껴야 오래 쓸 수 있었으니까.


이 습관은 아버지에게 평생 배어 있었다.

모두가 거실에 모여 있으면 “안방 불 꺼라.”

TV 혼자 소리 내고 있으면 “TV 꺼라.”

화장실 불을 켜둔 채 나오면 반드시 뒤이어 “불 꺼라.”

아버지의 입버릇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는 불 끄는 것을 자꾸 잊으신다.

제일 자주 가시는 화장실에서 한참 후에 나오셔도 불은 여전히 켜져 있다. 아니, 불뿐만이 아니다. 다른 기억들도 점점 희미해져 가신다.


어제는 누나의 아들이 몇 명이냐고 물으셨다. 통장 비밀번호를 잊으셨는지 나에게 아냐고 물으시고는, 손자에게 용돈을 주고 싶다며 현금을 찾아오라고 하신다.


손자 용돈을 챙기려는 그 마음은 여전하시지만, ‘불 꺼라’ 하시던 그 습관마저 사라져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나는 바란다. 아버지가 잊으신 기억 속에서 다시금 작은 불씨 하나라도 되살리시기를.

그리고 화장실 불을 끄고 나오시던 그날들처럼, 일상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오래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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