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무엇일까?
나는 귀가 약하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경탄하게 된다. 물론 ‘잘 듣는 것’의 의미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인내심이나 포용력, 비언어적 제스처, 대화의 밀도(?) 속에서 그 차이는 드러난다.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게 될까. 글의 잠정적인 결론은 이렇다. 어쩌면 고독과 약간의 유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것. 특히 습관적으로 틀어박혀 생각에 잠기는 유형의 사람은 ‘관념의 기둥’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화를 죽부인처럼 끼고 살아가야 한다.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황증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야기가 끊기지 않는 것. 북적이는 분위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밀한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만드는 것? 그러나 ‘듣는다’는 행위는 그보다 훨씬 개인적인 것이고, 어쩌면 독선적인 일의 문턱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부 아래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대류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서부터 ‘듣기’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해지지 않은 부분을 필사적으로 상상하고, 오해하고, 설명을 요구하며 또 요구받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면 스스로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둔감해지기 쉽다. 또 혼자 있는 지금, ‘듣기’를 안쪽에서부터 규명해보고 싶다.
나는 ‘듣기’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고, ‘읽기’이라면 그럭저럭 해내는 사람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다면 읽기의 감각을 경유해 듣기를 사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우연히 유튜브에서 황석영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관념의 기둥‘이 충돌하던 80~90년대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상범이 되어 다섯 해 동안 독방에 수감되었던 황석영은 이렇게 말한다. “독서 역시 소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생활도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한다. 혼자서 계속 읽다 보면 관념의 기둥만 남게 된다. 감옥의 후유증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몹시 깊은 관념주의자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관념과 기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념의 기둥’만 남아버린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감옥의 후유증. 사가미하라 사건의 가해자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우리는 무방비한 채로 듣게 되고, 언어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그 일이 고통스러워져, 스스로의 귀를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념의 기둥’은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황석영이 경계한 것은 ‘관념만 남은 사람’이지, 관념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관념의 기둥’이 반드시 고독한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과만 머무는 시간’은 결코 빠트릴 수 없다. 내가 아는 가장 허세 가득하고 냉소적인 사람도 외로움에 이기지 못한다. 의사소통, 인간적인 상호작용은 필수적이다. 그것들은 고독을 완화하고 활력을 주는 동시에, 불편함과 위험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스스로의 고독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혼자서 멋대로 생각을 질주하는 일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독선적인 사고는 타인이라는 세계에 부딪히는 것으로 설명을 요구당하고, 왜곡되고, 원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더 정교한 누군가의 말의 포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무엇보다도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비범한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은 이 지점에서 해체된다. 비범한 기쁨이란 평범성 속에서 놓칠 뻔한 미스터리를 건져냄에서 온다. 완전한 별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터전의 또 다른 주인들을 발견할 때 다가온다.
(갑자기?라고 느낄지 모르겠으나) 초등학생 시절, 비가 내리는 날에 산책을 나간 적이 있다. 운동장엔 웃통을 뒤집어까고 축구하는 친구들이 보였고, 동떨어져 혼자 있는 순간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우연히 작은 공터에 들어서자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숲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마을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고 넋이 나가있었다. 지면엔 차갑고 영혼이 느껴지는 흙, 그 새까만 흙에선 무엇이든 자라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롭게 다가오는 인상에 나는 멈춰 섰고, 금세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약한 행복과 함께 모든 것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순간 발 밑에 작은 반점들이 움직이고 있음에 알아차렸다. 땅뙈기의 한 부분에서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동시에 기분 좋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고개를 처박고 어정쩡한 자세로 한 그루 나무와 같은 꼴로 서 있었다. 비가 오면 땅에 물이 차서 숨을 쉬러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지식과, 지식을 떠받드는 여타 지식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 밑 세계는 나를 단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은 채 어설픈 접근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숲에 들어와 간신히 획득한 포근함이나, 보행자와 스스로를 구분 짓는 은밀한 마음은 깜깜한 흙 위에 놓이자 모든 영양을 빨려버리고 말았다. 흰 반점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이동할 뿐이었다. 은밀한 빗속에서 그보다 더 은밀하게 운동하는 세계가 있다. 경이로웠다. 섣부른 걸음으로 작은 주인들을 밟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숲을 빠져나왔다.
나는 언제나 내 키 정도의 높이에서 시계비행을 하며 살아왔고, 그 우연한 날, 전혀 다른 세계에 귀를 열게 되었다. 자연과의 접촉이 많았던 어린 시절, 고독은 종종 주변의 풍경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을 ‘평범’하다고 젠체하는 허세(혹은 피로, 에고, 수치심으로 나타나는 것들)를 버려야 한다. 풍경에 대한 인상뿐만 아니라, 사회란 무엇이며, 가족이란 무엇이며, 학교제도란 무엇인가 하는 모든 생각에 적용된다. 듣음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들어도 지칠 뿐인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충분히 고독했다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자신의 비겁함이나 추함, 꿈과 고귀함, 걱정과 바람만을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 없다면 들을 수 없다. ‘자기 자신하고만 지내는 시간’에 조차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한다. 그 시간이야 말로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임에 틀림없다.
프루스트를 읽다 보면,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순간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계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가장 사적이고, 가장 개인적이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장 객관적인 진실을 불러올 수 있을까?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지 않은가. 대부분의 시간을 관습의 힘으로 보낸다.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관성이다. 관성과 고독을 오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일,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순간이야에야 첫 숨을 쉰다. 불가해한 타인의 말처럼 우리를 긴장시키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은 없다.
‘듣기’에 대해 쓰려고 장면들을 떠올리다, 결국 외로움이 해소되는 순간을 회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 내가 고독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독을 견디지 못할까 두려워, 쓸데없는 질문들이 일상의 평온을 방해한다고 믿으며 그것들을 밀어냈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의 ‘듣기’는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현상유지. 그러나 다른 종류의 ‘듣기’는 고독에서 나를 찾아왔다. 듣기의 진짜 즐거움, 자기 변형의 기쁨은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상처받길 두려워하지 않기보다,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의 내부에서 고독하게 벼리고 벼린 말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으면서도, 그것이 누군가와 맞닿는 순간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그 서스펜스를 아이처럼 즐길 수 있는 것. 그 경계에는 대체불가능한 쾌감이 있다. 이토록 위태로운 존재의 위기 속에서도 헛웃음과 비애, 놀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라도 끝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기묘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