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화에 대하여

비유의 완성 ft 조르주 아감벤

by 이응사

인간화를 가능하게 하는 심적 상태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민이나 관용, 측은지심과 같은 ‘상냥함’을 소유함으로써 인간화가 진전된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예컨대 연민은 사회적 무능력이나 약함과 강하게 결부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 고령자·아이·장애인에 대한 이른바 ‘~취급’은 비합리적인 인식으로 전환되기 쉽다. ‘타자에 대한 흥미·관심’이라는 말, 혹은 비유 또한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벌레나 가축, 불필요한 것, 기계, 악마, 심실자(心失者) 로 비유된다. 이는 ‘인간’이라는 범주를 뒤흔든다. ‘인간’은 다시 생각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굴욕이라고 마저 느낄지도 모른다. 더구나 인간의 대체물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해에 의해 포장되어 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 미국은 일본인을 ‘이(虱)’에 비유했다. 나비나 장수풍뎅이에 비유한 것이 아니다. 박쥐, 쥐, 들개, 돼지도 마찬가지다. 쥐에는 번식, 더러움, 질병이 결부되고, 기생충에는 하찮음이나 밟아도 된다는 이미지가 부수된다. 악마는 절대악이며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알레고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비인간화만큼 인간적인 영위는 없다. 비인간화를 행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잃는 것도 아니다. 비인간화란 인간을 비인간에 비유하는 행위라기보다, 이미 특정한 취급 방식이 허용되어 있는 언어 게임 속으로 상대를 초대하는 행위가 아닐까.


우리는 상대의 얼굴에서 ‘벌레 같은 부분’을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살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관심을 가지는 살인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수년이나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일하며 심실자의 증거를 수집하는 것으로 ‘심실자의 비유’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불행을 낳는 존재, 불필요한 존재, 마음을 잃은 존재로 비유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비유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살인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비인간화의 비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 된다. 살인함으로써 비유와 현실은 동등해진다. 그의 독선적인 세계에서 그는 실제로 심실자를 죽인 셈이 되어버렸다. 그의 비유, 즉 ‘비인간화의 비유’가 이미 하나의 설명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살인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가해자가 사후에 부여한 비유만이 넷상을 떠돌고 있다. 생각하면 분노와 허무의 감정이 든다. 의문스럽다.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나. 왜 죽였나? 살인에 의해 완성된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므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인다는 것은 어떤 논리냔 말인가. 수고스러운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만큼 기존의 평이한 이해를 꾸짖고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는 것은 없다.


내 주변에는 결핍으로 가득한 유년을 보냈음에도 훌륭하게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친구가 몇 있다. 단속적인 우정이긴 하나, 때로 관계의 진지함이 일선을 넘는 경우가 있고, 그러면 나는 그들을 말 그대로 ‘인터뷰’하여 하나의 작품, 하나의 에스노그라피로 빚어내는 작업을 자발적으로 해왔다. 그 작업을 통해 그나 그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종류의 거대 이론으로 그들을 설명하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었고, 새로 알게 된 사실조차 하나의 틀에 고착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가 피상적으로 보인다. 원인이 내게는 명백해 보이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본다. 그러나 그 답답함, 해소되지 않는 앙금, 무심코 반론하거나 규탄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그 순간에만 반성할 수 있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일상에 불과하다. 그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필사적으로 들으려 할 수 있다.


알기 쉬운 문장으로부터 지적 유희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철학서가 읽히는 이유는 먼저 그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난해한 작품이 아닌가. 약간의 민망함을 견딜 수 있다면, 난해함으로 가득한 얼굴들의 여러 모습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인간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불가해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친한 사람에 대한 일상적 이해, 이해라고 부르기에도 석연치 않은 이해는, 단지 익숙함에 근거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비인간화의 비유’는 비유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지 비유의 형식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참된 비유란 ‘장애인은 심실자다’라고 말함과 동시에 ‘장애인은 심실자가 아니다’라는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장애인과 심실자는 떨어져 있지도 겹쳐 있지도 않다. 비유는 다른 장소를 가리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서 불필요함이나 심실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버리는 그 불편한 순간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그 감각을 개념이나 대상의 성질로 환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비유다. 고개를 좌우로도 상하로도 흔들지 않는 것. 입을 다문 채로 응시하는 짧은 순간을 우리는 경험한 적 있다. 비유는 설명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음의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형식이다. 비유를 들었을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거기에 분명 어떤 감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아감벤은 이를 ‘근접성’으로 설명한다. 대상과의 거리가 소멸하는 동일함이 아니라, 거리가 의미를 상실하는 관계, 너무 가까워서 건너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왕국의 은근한 열감을 의미한다. 비유가 가리키는 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도래해 있으나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비인간화의 비유, 특히 살인에 의해 완성되는 ‘비인간화의 비유’는 근접성을 낳지 않는다. ‘비인간화의 비유’는 살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근접성의 세계를 변호하기 위해 선임된다. 살인은 비가역적이며 관계의 완전한 단절이다. 비열한 비유는 그것을 언어적으로 중화할 뿐이다. ‘비인간화의 비유’란 비유적 언어로 비유를 끝장내는 비유다.


“쓸모없는 건 사실 아니냐”,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수준의 판단이나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다른 존재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이다”, “시간·돈·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없어지는 편이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증진한다” 같은 비유들이 인터넷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이 비유들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선 마치 어느 이야기 속 문지기처럼, 더 이상 말장난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비유로 말하면서 비유에서 빠져나왔다고 믿는다. 비유는 부정확한 가짜도 아니고, 현실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가장 위험한 비유란 그것이 비유가 아니라고 믿는 비유다. 살인범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스스로를 관점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여긴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그들은 대화 불요론자다. 자기 변용의 가능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이 비유가 아니라고 믿는 것은, 그 말이 해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는 것과 같다.


사가미하라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말을 접했다. 다운증후군 딸을 돌보는 사이슈 사토루(最首悟) 씨는 “미사여구나 강한 척을 말할 생각은 없다. 이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라는 마음과, 이 아이만 없었더라면이라는 마음은 내 안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다”라고 담담히 말한다. 또한 다큐멘터리 감독 노자와 씨는, 전 한센병 환자 지인과의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노자와 군 목욕하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수건으로 몸만 닦고 들어간 척했어요. 한센병은 옮지 않고 문제도 없는데, 저는 목욕탕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 자신의 차별입니다. 강한 반성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들의 삶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나는, 단지 지적 흥분을 위해 이런 비유를 사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오답이라고 생각하는 나이브한 신념 아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환해 버리면 빛이 바래버리는 리얼리티가 이 세계에는 분명 존재한다. 총천연색의 해석의 세상이지 않은가.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이란 『라따뚜이』의 생쥐처럼 머리 위에서 나를 조종하는 어떤 관념의 기둥 같은 것이 아니다. 의견이란 타자 그 자체가 아닐까. 타자와의 관계 방식 그 자체가 하나의 사유가 아닌가. 사유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타자의 지평을 생각하면, 충분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글이 인간화에 대한 하나의 비유가 되기를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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