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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Sep 05. 2022

그녀의 무덤이 잘 정돈된 이유

짧은 옛 역사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중 가장 잘만들어진 왕릉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동구릉이나 헌릉, 영릉 등을 말하곤 하는데 나는 폐비 윤씨의 무덤. '회묘' 라고 생각한다. -이 무덤은 원래 회기동에 있었는데, 1969년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회기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회묘가 있었던 땅이라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는 딱 한번 가봤다. 서삼릉 안에 있는데 묘역 근처가 농협부지라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선착순으로 예약해야 한다.

  이 무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제외되어있다. 연산군은 자신의 엄마인 폐비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켜 그에 맞춰 무덤을 만들었는데 연산군이 쫓겨난 뒤 중종은 이 무덤을 '능'에서 '묘'로 격하시킨다. 그래서 유네스코 목록에 이 무덤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 무덤은 왜 조선 왕릉 중 가장 잘만들어진 무덤일까.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회묘의 석물을 보면 유난히 정성스럽게 조각이 잘되어 있다. 이렇게 된 데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 무덤을 만들때 감독관이 이세좌였기 때문이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갖고간 사람이다. 연산군은 자기 엄마한테 사약을 들고 간 사람에게 무덤 조성 임무를 맡긴거다. 이세좌가 이 명을 받았을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에 맞긴다.

 애니웨이, 난 회기동을 갈때나 서삼릉을 갈때마다 폐비윤씨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녀의 인생이 정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둘째 마누라 였다. 성종의 첫째 아내는 한명회의 둘째 딸 공혜왕후였는데 이 사람이 성종 재위 6년만에 죽자 다음 중전으로 간택된 사람이 폐비 윤씨다.

 왜 성종이,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 왕실의 어른이었던 정희왕후-세조의 아내-, 인수대비-성종의 엄마-는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선택했을까. 역사가들은 당시 가문이 한미했던 윤씨-그의 아버지는 윤기견으로 40대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윤씨는 과부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의 특성을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주목했을꺼라고 본다. 나도 그   시각에는 동의하는데 한가지 관점을 더하고 싶다.

 앞서 윤씨의 성장배경을 설명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고 했다. 이건 성종의 성장배경과도 일치한다. 성종도 홀어머니 인수대비 밑에서 자라났다. 물론 왕자였던 성종과 과부밑에서 억척스럽게 자라나야했던 윤씨의 성장환경은 다르지만, 인간이란 그리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윤씨와 성종은 같은 성장 배경 하에서 태어났기때문에 서로 공감하는 측면이 많았을 확률이 높다. 성종은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면서 "매사를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했다" 라고 평했는데, 이건 성종 본인에 대한 당대 평가-"매사 정성으로 사무를 대했다"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버지를 잃은채 자라난  남녀의 마음속에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동일하게 스며들었고 그것이 타인에 대한 조심성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과 윤씨는 서로에게 끌렸다고 봐야하는게 맞지않을까.

 공교롭게도, 이건 당시 왕실어른들이 윤씨를 바라보는 심정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윤씨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남편을 잃은 채 살았던 정희왕후와 인수대비를 생각해보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윤씨로선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자신의 홀어머니와 크게.다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두사람도 자신의 심경을 잘 헤아려주는 윤씨를 좋게 봤을 확률이 높다. 윤씨가 중전으로 책봉됐을때 교서를 보면 "중전은 세 대비-정희왕후, 인수대비 외에 예종의 부인도 대비였다-를 효성으로 모시고" 라는 표현이 있다. 물론 의례적인 표현이지만, 나는 이 글귀 속에 홀어머니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눈치챘던 윤씨의 평소 모습을 짚어보곤한다.

 공교롭게도 이 "효성으로 모시고" 라는 표현이 윤씨의 발목을 잡게 된다. 윤씨는 연산군을 낳은 뒤 3년도 되지 않아 쫓겨나는데 성종은 윤씨를 쫓아내면서 "사람됨이 변했다"고 했다. 정희왕후는 신하들에게 "내가 사람을 잘못봤다"고 말할정도로 윤씨가 변했다는 걸 인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윤씨는 긴장이 풀어진 거라고 봐야한다. 아들-연산군-을 낳으면서 중전이라는 지위가 확고해졌다. 그동안 눈치를 보면서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심리가 생겨났다고 보면 너무 그녀에게 가혹한 처사인걸까. 그 보상심리도 억제했어야 했다고 해야할까. 성종은 윤씨가 투기와 질투로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면서 이를 폐비의.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윤씨를 사가로 쫓아낸지 3년뒤 별다른 이유없이 사약을 내린다.

 그녀의 죽음에 드리워져있는 많은 이유들은 나로선 설명하기 어럽다. 성종과 윤씨 사이에 있었던 내밀한 이야기들은 실록에 다.기록되어 있지않다. 윤씨가 성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성종의 일방적인 비난 기록만 있을 뿐이다.

 다만, 단 한번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 살려고 노력한 순간 그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단 그녀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너무나 섬세했던, 그래서 폭주할수밖에 없었던 자제력이 너무나 낮았던 연산군의 성격이.그녀에서 물려받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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