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그림자 속에서 마주한 사랑, 불균형의 교차점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기.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권력과 계급, 인종과 역사가 얽힌 복잡한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뒤라스의『연인』은 그 구조 속에서 만난 두 인물-30대 중국인 남성과 10대 프랑스인 소녀-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과 더불어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치열하게 묻는다.
그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부는 그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부에 속박된 삶. 식민지 사회에서 유색인으로 낙인찍힌 존재. 프랑스로 유학마저도 이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부에 가려진 그림자였고, 피지배 계층이라는 한계에 묶여있었다.
그런 그가 마주한 소녀는, 백인이었지만 너무나 가난하고 연약했다. 권력도, 보호도 없이, 몰락한 가세 속에서 방치된 채 살아가는 아이.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쩌면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부와 권위의 껍데기를 벗겨내면 남는 것은 외로움, 부서질 듯한 불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감뿐인 그였기에…
그가 그녀를 정성껏 씻겨주는 행위는 단순한 애무를 넘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는 행위였다. 그의 삶에서 숱하게 지나간 피상적이고 조건적인 사랑들과는
달리 그녀의 몸을 닦으며 그는, 허울뿐인 껍데기 뒤에 숨겨져 있던, 상처받고 발가벗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그녀는 날 것 그대로의 존재였고, 상처받은 자신을 닮은 순수함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자, 자기 연민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다. 식민지 사회에서 밀려난 가난한 프랑스인, 집 안에서도 언제나 시선 밖에 서있던 존재였다. 어머니의 애정은 한쪽으로만 기울었고, 그녀는 그늘 속에 남겨졌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사회적으로는 배제된 타자였을지라도,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자신을 지켜주려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그녀는 가족에게서 끝내 받지 못한애정과 안전을 느꼈고, 이를 통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에게 끌린 것은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결핍을 메우려는 본능이었고, 존재를 확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연인이자, 동시에 결핍을 보듬어주는 대체 가족이었다. 그의 부와 그녀를 향한 애정은 그녀에게 하나의 울타리였고, 그 안에서 그녀는 잠시나마 기대어 쉴 수 있었다.
늪지처럼 습한 베트남에서 그녀의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파편처럼 부서진 기억을 기워 살아온 그녀의 삶에서 ‘그’라는 존재만은 언제나 선명했다.
두 사람은 계속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권력과 계급의 질서가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그들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이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불균형한 감정의 교차점이다. 나이, 인종, 계급, 성별, 조국...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애틋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그를 통해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상처 입은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향한 듯 보였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이었다.
뒤라스는 이 관계를 통해, 사랑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마주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타자를 거울삼아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 시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마주한다.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과내면을 마주하게 되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 선명함 속에서, 뒤라스는 사랑이란 끝없는 자기자신에 대한 질문임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