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게

값진 선물

by 리진수

<값진 선물>

몇 년 전 jtbc에서 방영했던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드라마도 아니고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아니었다. 나에게도 이 드라마를 인생드라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면 최근 이 드라마에서 인상적이었던 대사가 있었다. 이때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지만 요즘엔 대세배우인 손석구 배우가 전여빈 배우에게 말했다. "당신은 오늘 값진 여행을 한 거야, 이제 집에 가서 선물을 받아 가면 있어". 앞뒤 맥락도 없이 이렇게만 적어놓으면 그대들이 나에게 "이게 뭔 소린데"라며 따질 것만 같아 전여빈의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전여빈은 극 중에서 한 사건을 겪고 아주 큰 트라우마를 앓아 환상이 보이는 등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 큰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정신과 담당의사가 전여빈에게 솔루션을 내세웠다. "여행을 다녀와도 좋고 다른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기"라는 미션을 주고 끝에는 "휴식은 집에서 하는 게 아니래요"라는 말을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는 전여빈이 기부했던 기부처에서 손석구를 우연히 만나서 아이들이 남긴 식판 설거지나 하고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쮸쮸바나 빨아먹었다. 그런 별거 아닌 하루를 보내고 손석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손석구가 전여빈에게 한 말이 저 말이었다.

"아 그래 앞뒤 내용은 대충 알겠는데 그래서 저게 뭔데"라고 생각하셨다면 네 삐빅 정상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 현재로부터 약 3달 전의 나는 삐빅 정상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중첩되어 무기력, 부정적, 자괴감으로 똘똘 뭉친 하나의 검은색 덩어리가 나를 덮쳤다. 요즘 방송인, 유튜버들이 쉽게 나락을 가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한 일도 아니었지만 남들이 아닌 나 스스로가 나를 점점 나락으로 빠트려갔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지금 쓰고 있는 글도, 다른 취미들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 침대에 누워서 무기력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는 무슨 이유로부터 이런 감정들이 피어오르는 건지 원인조차 알 수없었다. 아니 알기 싫었던 것이었던 걸 지도. 마치 전여빈과 비슷한 상태였던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상태인지 알 수조차 없었던 때 너무 답답한 마음에 직장 내 친한 형에게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니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당연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뭔가 잘못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당분간 이 환경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래 요즘 스트레스로 절여진 MZ 직장인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가장 좋은 '여행'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도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덩어리를 지울 지우개가 정말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에 휴가를 내고 여행 1주일 전 비행기 티켓과 숙소만 예약했다. 비행기가 뜨기 전날까지 설레는 기분은커녕 우울한 기분만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 팀 팀장님이 일본에 누구랑 가냐는 물음에 "혼자 가는데요"라고 답하니 "에? 혼자 왜가"라고 말하시며 어이없어하셨지만 뭐 어쩌겠는가.(사실 23살에도 혼자 후쿠오카 여행을 갔었다고 한다) 여행 전날밤 집 냉장고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다시 돌아오면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는 문구를 반신반의하면서 적었고, 여행 당일 일본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고 난 무작정 혼자 떠났다.

세부 계획 따위는 없는 자유 여행이었다. 계획이라는 틀에 맞춰진 여행 말고 진짜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싶었다. 홀로 일본땅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한국땅에서 있었던 나의 모습은 생각조차 안 나도록 말이다. 그래도 위안이 좀 되었던 건 약 몸 값이 200만 원 정도인 '후지필름'이라는 브랜드의 카메라를 여행메이트이자 친구 삼아 내 허리춤에서 함께 했다.(그래도 앵간한 여행메이트보다는 괜찮았다) 일본 공항에 내려 우왕좌왕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카메라를 꺼내 무작정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저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도 먹고 거리에 다니는 일본 사람들도 구경하는 하루를 보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카메라 가방에 있는 렌즈를 갈아 끼우며 여러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중 마음에 드는 사진도 몇 장 건졌다. 누구와도 한마디 하지 않고 철저히 혼자의 여행을 즐겼고 저녁에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즐겼다.(일본맥주는 역시 너무 맛있었다) 그 이후에 도미토리로 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는 서양인이 누워있었고 자기 전 침대에 앉아있던 중 내 윗침대에 자리 잡은 한 한국인과 가벼운 인사를 했다. 별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10살 많았고 부산에 살며 현재 건강보험공단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보는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경계는 했지만 부드러운 인상과 말투에 조금은 안심했다. 그렇게 30분 넘게 이야기를 했고 늦은 밤인지라 옆에 누워있던 서양인의 눈치를 보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서양인이 웃으며 "That's okay, keep going"이라고 말했고 고마웠다. 이 형님은 대마도에서 친구들과 1박을 하고 여자친구, 여자친구 어머님과 후쿠오카 여행을 왔고 숙소를 따로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고 어쩌다 보니 서로 카톡아이디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내일 저녁쯤 야키토리에 맥주 한잔하기로 약속도 잡았다. (진부한 헌팅의 과정이랄까요) 혼자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낯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소도시 여행을 했고 무작정 길에서 세차를 하고 있는 장발의 바버샵 사장님에게 파파고를 돌려 여기 현지인 맛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렇게 추천을 받아 일본가정식 집에 갔는데 맛있게 먹었다. 소도시에서 혼자 온천도 하고 하염없이 걸으며 계속 사진만 찍었다. 날씨도 적당해서 꽤 괜찮았다. 그리고 숙소 근처로 돌아와 걷던 중 일본 냄새를 풍기는 남성에게 다가가 어쭙잖은 영어를 써대며 인물스냅촬영을 요청했고 인상이 무서웠던 일본인 남성은 친절하게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으로 사진을 보내주며 마무리했다. 나의 첫 섭외 촬영이었다. 많이 망설였지만 그 순간 용기를 낸 내가 뿌듯했다. 사진을 찍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내가 용기를 내고 싶은 목적이 더 컸다. 국내에서는 쉽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외에서는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가 졌고 선글라스를 끼고 스타일이 좋은 서양인에게 다시 도전했다. 그렇게 또 사진을 찍었다. (서양인인 줄 알았지만 사실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뭔가 만족스러운 기분이 돌던 중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형님을 만나 야키토리 집으로 가서 야키토리와 맥주를 먹었다. 서로 한국에 있을 때 힘들었던 고민을 털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최근 내가 힘들어했던 것들에 대해 말했고 인생 10년 선배인 그 형님은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잡아주어 고마웠다. 타지에서 낯선 사람과의 술 한잔은 꽤나 달콤했고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 이후로 또 다르 소도시를 가서 젊은 일본인 커플을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너무 사진이 청춘 감 있게 잘 나와서 기분이 좋았고 그날 저녁 숙소 근처에 있는 로컬 야키니쿠 집을 가서 혼자 고기와 맥주를 먹는데 인상이 찌푸려 질정도로 맛있었고 그 분위기에 취해 그 순간만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은은한 술감에 삼각대로 힘들게 사진을 찍고 있는 한국인 여성분들 1팀과 일본인 여성분들 1팀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이후로도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며 혼자 4박 5일의 후쿠오카 여행을 마무리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여행을 할 때만큼은 그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내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떠나기 전 화이트보드에 적어놓았던 "다시 돌아오면 선물이 있을 거야"라는 문구를 다시 보며 말로는 설명 못할 값진 선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리프레쉬한 나는 그렇게 다시 일과 일생생활을 지내면서 마인드셋과 생각 자체가 바뀌어있었고 그 이후 몇 개월 동안은 매사가 행복해졌다.(과장이 아니고 정말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또 힘든 순간이 찾아오고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그대들도 필자처럼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을 거고 그 순간을 이겨낸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이겨내는 방식은 모두 다를 것이니 각자의 방식이 있을 거다. 우선은 어디든 나가서 그 값진 선물을 얻어 그대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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