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첫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과에 입학한 이례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과제는 아니었지만, 영화과 학생으로서 한 작품의 연출을 맡는다는 것은 모든 학생들의 꿈과 같은 것이기에 제작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시나리오의 전체를 창작해보기로 했다. 더군다나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어떠한 파트에 가고 싶은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의 기본이 되는 시나리오를 써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예전 중고등학생 시절, 백일장을 나가고 짤막한 단편 소설 몇 편을 써 본 적은 있었지만, 장편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창작해본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하다고 자부했기에, 큰 고민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
하지만 노트북을 젖힘과 동시에 이유 모를 무력감이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재라고는 생각날 때마다 그때그때 노트에 적어두었던 짤막한 단어들이 전부였고, 비록 짧은 단편이지만 이야기 하나를 완결지어야한다는 부담감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무력하게 오전을 모두 써버릴 수는 없었기에 내가 예전에 창작했었던 시 몇 개를 다시 찾아보았다. 머지않아 나는 적절한 시 한편을 찾을 수 있었다.
기름을 짜내듯
억지로 짓이겨낸 문장 따위야
가식에 듬뿍 젖어
무취의 마침표를 찍어낸 문장 따위야
잠시 염두 어디쯤에 던져두고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바라본다
단조롭지만 담백하게
치졸하지만 솔직하게
나지막이 써 내려간
진짜 이야기
때 묻지 않은 순수에
그렇게 한 발짝 더 다가선다
예전에 저장해두었던 <시나리오> 라는 제목의 자작 시였다. 이 시를 짓고 난 지 꼬박 3년만에 다시 보자, 나는 이내 마음의 울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작법 기술들과 영상 문법, 현실적인 제작 환경 등을 고려하느라 시나리오의 소재만 정하는 데에도 몇 시간을 흘려보낸 것을 후회했다. 시나리오란 가장 단순하고 내 내면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이라고 말했던 3년 전의 나를 다시 돌아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내가 가장 관심있는,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작법의 기본이지만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 앞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나를 비교적 명확한 '작법 공식'이라는 틀에 집착하고 매달리게 했다. 공식을 활용하는 건 해봤어도 공식 밖을 아예 벗어나는 것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법 공식 뿐만 아니라 많은 단편 영화 수상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청하고 그 시니리오를 정독하는 것은 작가들도 권장하는 훌륭한 창작 연습 방법이지만, 막대한 양의 인풋(input)만 넣고 아웃풋(output)을 전혀 내놓지 않는, 일종의 현실도피와 같은 행동이었다. 예전에도 나는 항상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그에 관련된 수많은 이론, 예시와 같은 정보를 매우 많이 수집하곤 했다. 그 때문에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그에 대한 지식만 방대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었다. 오늘 이렇게 시나리오를 창작하며 다시 깨달은 것은 내가 항상 무언가를 직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여태껏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평론하는 입장과 제작하는 입장
나는 이제껏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들을 가리지 않고 감상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 결과, 이에 대한 지식과 레퍼런스는 매우 풍부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시나리오를 창작하고 나자, 이미 완성된 작품을 나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평론하는 것은 매우 명확하고 비교적 간단하지만 직접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은 그 결과물이 어떻든 간에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방 한구석에 들어앉아 짤막한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는 데에도 머리를 싸매고 버거워하는데, 하물며 영화 한 편을 연출한다는 것은 수많은 고뇌와 판단의 과정을 겪고도 완성된 작품의 비판에도 개의치 않아야 하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막중한 자리가 아닐까.
길을 찾아서
수많은 자료와 직감과 지식에 의지하여 전체적인 줄거리를 쓰고 나면, 계속해서 '과연 이게 최선인가'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노트북을 붙들고 버티다 갑자기 번뜩이는 플롯 전개와 대사가 생각이 나 정신없이 노트북에 써두어도 몇 분만 지나면 맥락없는 글 쪼가리처럼 느껴져 그 작업을 수도없이 반복해야 했다. 덕분에 대사와 지문이 있는 시나리오도 아닌 그저 정리되지 않은 줄거리 요약에 불과한 시놉시스(synopsis) 고작 5줄 만이 백지의 여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고된 작업을 통해 분명히 얻은 한 가지는 '자기 확신'은 창작자의 생명과 같은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글 쓰는 작가, 그림 그리는 화가, 영화 만드는 감독 모두에게 있어서 외로운 창작 과정은 필수적이다. 자신의 작품을 세상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긍정적으로 평하지 않아도 단 한 명, 자기 자신만은 믿고 그 작품을 끝까지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시나리오 창작 경험을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순 없겠지만, 무조건적인 실패라고도 평하고 싶지 않다. 이 창작 과정을 통해 나는 창작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인 '자기 확신'을 피부로 느끼며 깨닫게 되었고, 비록 창작이 내 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 자신만은 내가 가는 길을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