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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대추차 사건

          정치 어디까지 해봤니? 회사 생활하면서 정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인간이란 모두 자기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고, 각자의 이해타산에 맞게 행동하고 움직인다. 나쁜 일은 아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정치 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른다. 영국 유학파에 원어민이 아닌 사람이 영국과 미국 호텔을 경험하고 5 스타 호텔에서 이벤트 매니저를 달았다는 사실은 나를 자존감 충만한 인간으로 만들었고, 내 뼛속 깊은 곳까지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각인되어있었다. 거기에 30대 초반이라는 나이는 나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사내 정치? 총지배인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 다하는 패기 넘치던 나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업도 아니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감정노동자에 불과한 호텔 매니저의 자존감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울수도 있겠지만, 자기애가 충만한 나에게, 타인의 잣대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나는 뼛속까지 근면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칭찬받고 인정받아야만 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항상 보스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설프고 숙련되지 못해도 나의 아등바등 애씀을 다들 이뻐라 하셨고, 여기가 아니더라도 나를 원하는 곳은 많다고, 그리고 누구보다 면접스킬과 이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났던 터라,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칭찬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두세 번만, 더 고민하고 일처리를 하다 보면 상사에게 혼 날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던 내가 강적을 만났다. 얼핏 보기에 완전 부산 로컬 꼰대 부장 콘셉트이었다. 진한 부산 사투리를 걸축하게 사용하는 풍채 좋은 부장은 유달리 화가 많아서 아침 미팅마다 과장들에게 혼을 내는 전형적인 로컬 보스 스타일이었다. 사랑만 받던 나는 세일즈 부서로 보직을 변경하며 만난 이 보스 앞에서, 세일즈의 스킬과 마켓 상황의 이해도, 전략, 인맥, 커넥션 무엇하나 가진 게 없는 초짜 이벤트 세일즈 과장이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그의 기분을 살피며, 매일 한 명씩 눈앞에서 깨지는 상황을 보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근무했다. 일에 대한 샘은 많아도 보스에 대한 샘은 없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나는 사회성을 전혀 발휘하지 못할 때라 상사나 직원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는 핀잔을 자주 받았다. 


        부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화를 낸다. 화가 저렇게 많은 사람은 사십 평생 처음 본다. 보직변경 후 허니문 기간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것 같았다. 고작 3일의 핸도오버의 트레이닝이 끝난 후 바로 실전이었다. 융단폭격이 가해진다. 전생에 축구선수 이기라도 한 걸까. 사람을 코너에 물어놓고 이런저런 질문을 퍼풋기시작했고, 나는 그 많은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여러 과장들 앞에서 무자비하게 전사했다. 


        일단은 직장 생활하면서 처음 혼나보는터라 상황판단을 잘 못했고, 내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고 지켜보던 과장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부장의 메시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몬가 억울하고 분했지만, 자리로 돌아와 차분히 그의 질문들을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의 질문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질문이었고, 업무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나의 무능력이 -감정을 드러내고 나니- 고스란히 얼굴을 내밀었다.  


       윽박과 고함. 한심하다는 눈빛. 어이가 없다는 말투와 표정. 메시지 전달 과정에서 부장의 방법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부터 사회생활을 한 부장의 업무 스타일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세일즈는 숫자로 말해준다고, 부장이 부임 후 모든 숫자는 흑자로 전환했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략회의. 퍼포먼스미팅. 데일리 세일즈 브리핑. 나는 매일 매달 깨지고 있었고, 욕을 그렇게 먹어도 부장이 적응되지 않았다. 수치스러웠지만 부장의 질문이나 업무 방향성은 대부분 이성적이었기에 인사부를 찾아가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째 부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사모님과 함께 살고 계신데.. 측은한 50대의 가장의 모습으로 지독스러운 감기를 꽤나 오래 앓고 계셨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일주일을 넘어서자  그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친한 동료 매니저에게 부장이 감기를 오래 앓고 있는 것 같다 했더니 대추차가 좋다며 준비해둘 테니 내일 출근근에 들려 갖다 주라고 했다. 


         부장과 나는 8시 전에 출근하던 때라 아침에 건너 주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새벽 수영을 마치고 서둘러 회사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 부장이 웬일로 내 이름을 부른다. 오전 7시 40분.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유니폼도 입기 전에 감기에 좋다는 대추차를 준비해 그의 오피스에 들어가자,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픈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크게 혼내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연간 행사를 받았다는 이유이다. 연간 1억이 넘는 행사를 잡고 욕먹는 과장은 나밖에 없을 거다. 그는 내가 잡은 행사때문에 객실과 함께 쓰는 그룹이 들어오면 어쩔거냐고 나를 다그쳤다. 이른 아침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융단폭격을 맞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대추차를 준비해온 내 오른손이 처량해지는 순간이었다.  부장과 나는 절대 맞지 않구나..... 


        모든 화를 쏟아부은 부장은 그제서야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준비한 대사도 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거 부장님 드시라구"… 외마디 남기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 8시 30분. 리더십 커미티 미팅에서 돌아온 부장은 그 이른 시간 어디서 이 귀한 대추차를 얻어 마시냐는 다른 리더들의 코멘트를 받고서야 내 성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부장과 나는 이 일을 일명 “대추차 사건”이라 부르고, 조금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그때 내가 크게 배운 한 가지는 아부는 필요 없다. 일이나 똑바로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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