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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사계절

         마흔둘… 곧 죽어도 만으로 아직은 마흔 하나이다. 서른 후반이 넘기 시작하면서 만 나이에 묘하게 집착하게 됐다. 예전에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살아있는 한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 그래서 그때부터 나이를 카운팅 하는 유교사상에 찬사를 보냈지만, 이제는 만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서양인의 현명함과 실시간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이 21세기에 동일한 나이 체계를 가져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 무기력감을 느끼면서도 나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렇게 뾰족하고 날카롭고 예민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제는 별로 재미있는 일이 없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며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회사생활도 10년이 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인종들을 상종했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여자 보스를 끔찍이도 못 견뎌하던 급기야 삿대질을 해가며 생명에 위협을 줬던 이라크에서 온 아저씨도 만나봤고, 내가 흑인이라서 너는 나한테만 일을 시키는 거 아니냐는 하극상의 끝판 왕 아프리카 아메리칸도 상대해봤다. 한 번은 결혼식을 진행하던 중 어떤 여자가 건장한 사내들을 이끌고 와 품에든 갓난아기를 보이며 무대 위 신랑을 향해 이 아이의 아빠는 저 남자입니다.라고…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은.. 이거 몰래 카메라냐, 아침드라마 찍는 거 아니냐는 하객들의 무자비한 컨플레인도 핸들 해봤다. 

이 세상에 나를 더 놀라게 할 만한 일은 없다. 


         아직 못 가본 대륙이 한두어 개 더 있기는 하지만 끔찍한 테러와 더 끔찍한 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하는 시대에서,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은가… 이 흉측한 역병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시대에 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정신과 학자가 그랬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인가.  긍정적인 마음이라는 건 자기 합리화와 기만. 자기 성찰의 부재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것도 없다. 만사가 귀찮고 하루하루 몸이 늙어가는 게 느껴진다. 내 간수치와 빈혈 수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몹시 피곤하다.  


         이제 내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이 보편적인 일상을 버텨나가느냐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 마사지를 하며 5분은 더 침대 위에서 개길 궁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9시 출근해서 9시 5분쯤에는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놓친 톡은 없는지 세상에 내가 모르던 뉴스는 없는지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습관적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본다던가 등등. 생각 없이 그냥 의식의 흐름데로 살다가,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쯤 마시고 전생의 번뇌는 모두 잊고 평온을 찾아 저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보고 싶다는 유치한 공상으로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 나에게는 빚이 있다.. 나가자 일터로’’라는 여느 다른 직장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연명한다. 


         내가 일하는 인터내셔널 호텔 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새로운 시도이다. 식음부서에는 매년 Master of food and wine라는 특별한 행사를 진행한다. 호텔이 위치한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지역 요리나 특성을 살려 지역의 장인들을 초청해 독특하고 차별화된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선보인다. 독특한 와인, 샴페인들을 페어링 하여 새로운 형태의 파인 다이닝의 경험을 도시의 미식가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두 번째 Master of food and wine을 준비하게 됐다. 이번에 셰프가 준비한 주제는 ‘코리안 티 마스터’였다. 지역에 위치한 티 연구소의 대표와 함께 한국의 전통 차를 소개하고 퍼포먼스 보여주는 자리. 우리 이태리 총주방장 셰프는 업계에서도 섬세함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거가 몇 번을 찾아가 티 마스터의 마음을 갈구하여 얻어낸 기회였다. 그만큼 가격도 어마 무시했다. 세팅부터 좌석배치까지 티 마스터의 섬세함이 곳곳에 묻어놨고 심플하지만 세련되고 도도한데 무려 깔끔하기까지 했다. 장인답게 품격 있는 퍼포먼스가 진행됐고, 모두를 숨죽여 지켜보게 만들었다.  


           서비스를 진두지휘하던 나는 뒤에서 티 마스터의 준비를 도왔다. 식사 서비스가 나가고 다음 차를 준비하던 티 마스터가 차 한잔을 건네며 말했다. 찻잎을 언제 따느냐에 따라서 차의 종류와 맛이 달라진다고,,,, 이 차는 아주 오랜 퇴적의 과정을 거친 차로 판매가가 무려 한잔에 만 오천이라고 하셨다. 한번 맛이라도 보라는 티 마스터의 제안에 나와 우리 서대리는 서로의 눈을 잠깐 쳐다보다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각 한 사발씩 마셨다.  쌉싸름하면서 뭔가 떨떠름하고 쓰고 맛이 없었지만, 이렇게 비싼 차를 어디서 마셔보겠냐며 우리는 족히 10만 원 치는 마셨을 거라며 히히덕거렸다. 


        행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뒷정리를 시작하자 티 마스터가 말했다. 매일 이렇게 바쁘게 살아서 어떡하냐며… 계절은 느끼며 살고 있냐고… 그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마시는 차가 나눠져 있으니, 그 차를 마시며 그 계절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행사 진행하느라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 그 행사장을 내리째던 햇살이 늦가을의 햇살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행사장안의 VIP 손님들이 고가의 특별 코스요리를 먹고 있을 때, 행사장 밖에 있던 나는 더 비싼 강의를 듣게 된 것만 같았다. 해운대에 일하면서 매년 열리는 모래축제도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나이를 먹고 산전수전 다 겪어본것같았던 여자는 이제서야 계절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의 꽃. 여름의 바다. 가을의 단풍 겨울의 눈… 내 눈과 마음으로 그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보편적이지만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시간으로 남은 시간을 채워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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