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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레이디 터치

         면접만 보면 합격 100프로를 자랑하던 시절. 이제 나의 목표는 런던 하이드 파크에 위치해있는 세계 유수 호텔로의 진입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경력 포트폴리오도, 레퍼런스도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어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접이라는 건 항상 긴장되는 자리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에 대해 단 20분의 면접으로 결정한다.  


        풍채가 좋은 세련되고 도도한 인상의 한 영국 남자가 호텔 지배인답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본회사에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은 그와 말투와 복장만으로라도 그 보다 더 높은 직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다른 한 남자가 면접장에 들어섰고 이내 면접이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나의 최대 무기는 수줍음과 상냥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살짝 들어간 보조개와 동방예의지국 출신다운 매너.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학벌과 경력이다. 그들은 나의 이력에 관심을 보였고, 이제 남은 건 나의 인터퍼스널 스킬과 영어능력뿐이었다. 


         면접이 시작된 후의 자기소개와 이력 소개가 무난히 지나가고 이제 경력에 대한 폭풍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무난하게 선방하기 시작했다. 장점은 겸손하면서도 부풀려 설명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단점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나도 부족한 사람이라 더 있을 텐데 생각나면 이메일로 정리해서 다시 보내드리겠다는 농담으로 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게 역력했다. 


         이 기회를 잘 이끌고 나가야만 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의 평가가 학벌과 용모이지만 서양에서는 캐릭터로 평가하기 때문에 유쾌하고 호방한 성격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지루하다는 건 최고의 욕이다. 화기애애한 인터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근무시간이 길고, 다른 포지션에 비해 강인한 정식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수십 명의 단기 알바 직원들을 핸들 해야 되는 이벤트 서비스 매니저를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성격이 아닌지, 체력적으로 감당 가능한 업무의 영역인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자 나는 이내 조금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천성을 바꿀 수도, 성별을 바꿀 수도, 체력을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바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의 질문들이 쏟아지자 이제부터는 말발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5 스타 호텔 경력이 없어 염려스럽다는 질문에도, 서비스는 등급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고 매니지먼트 역량에 따라 다르다고, 면전에 대고 호기롭게 대답하던 나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파란 눈, 노란 머리카락의 사내들 앞에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벤트 서비스팀에서 여자 매니저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고, 이것은 고강도의 체력을 요하는 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력에도 나와있듯이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벤트 부서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이벤트가 너무 좋아 시작했던 일이고, 이곳보다 더 큰 행사장의 행사도 차질 없이 이끌어왔다. 이벤트의 특성상 남자 직원들과 남자 매니저들로 둘러싸인 업무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부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자들만 있는 부서에서 “레이디 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레이디 터치 한마디에 내 앞에 앉아있던 두 면접관은 말 그대로 빵 터지고 말았다.  레…. 레이디 터치? 뭔가… 영어가 틀렸나. 뉘앙스가 웃겼나… 순간 온만 생각이 떠올랐지만, 원어민이 아닌 내가 그 문장의 잘못된 뜻을 알아채기는 이미 늦었다. 


       나는 여성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더 세심하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지만 – 물론 남성에게 이 걸 기대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 한참을 웃던 두 면접관은 다시 레이디 터치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고 했다. 이제 정말 틀렸다고 생각한 나는 그게 뭔지는 나를 입사시켜 주면 보여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면접의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졌고, 사흘 후 나는 최종 합격자가 되었다. 


       면접은 면접에 불과하다. 10분-15분 동안 나의 능력과 근면 성실함을 증명하기에는 어렵다. 매니저로써 수십 명의 직원들을 인터뷰하고 같이 일해본 결과, 어떤 직원은 처음부터 빛이 나지만, 알고 보면 영악하기 그지없는 이가 있고, 처음에는 더딘 것 같지만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가는 이도 있다.  


나 역시 레이디 터치로 기회를 얻었지만, 꼭 필요한 인재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해나가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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