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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2. 2023

생존을 위한 발레

- 발레편 

        14년 동안 한 업종에서 윗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회사생활을 했다. 더 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윗분들의 꼬임에 넘어가 제주도에서 진행하는 큰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라는, 펜데믹이라는 강제 감금의 시대를, 역병의 시대를 맞았지만 마치 신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실직의 위험도 피하며 아름다운 제주에서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프로젝트는 오픈하였지만 코로나의 규제로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사이 몇 달은 이렇게 월급을 받아도 되나 할 정도로 빈둥거리며, 사장이 호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일하게 또 평화롭게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나의 기질, 나의 성정으로는 내가 인정하는 않는 자들의 허무맹랑한 지시에 참을 인자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새겨도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귓등으로 듣고 치우면 될 사장님 말씀을 3년까지 듣고서야 나는 제주도를 떠났다. 


      연봉 25% 인상과 맞바꾼 나의 삶은 DAY1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첫 출근에 밤 9시 퇴근. 둘째 날부터는 줄곧 밤 12시를 넘게 되며 9시면 취침에 들어가시는 칠십 대 노모와의 뜬금없는 연락두절이 석 달째 어어져오고 있었다. 

입사 3개월 차에 첫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업종에 도전해 보겠다는 내 패기가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직장생활 15년 만에 번아웃이라는 걸 느꼈다. 내 몸뚱이가 내 몸뚱이가 아닌 상태.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오십견을 맞이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일하다 이 자세 그대로 화석으로 굳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게 편리한 서울 생활인줄 알았더니 50미터 수영장을 찾기도 쉽지 않고 인구밀도가 높아서인지 강습 끊기도 경쟁이 치열했다.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난 아직 시집도 못 가보지 않았던가… 


      집 근처에서 할 수 있을만한 운동을 찾던 중 발레 학원이 보인다.  성인발레가 유행하고 죽기 전에 일자다리 한번 찢어보는 게 나의 로망 중에 하나였지만, 이 뻣뻣한 내 몸뚱이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발레학원 상담을 신청을 하고 떨리는 마음과 어리숙한 표정으로 학원을 찾았다. 내 삶과 내 살아온 인생과 가장 멀리 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여겼던 발레학원을 내 발로 찾아가다니… 이것은 어떤 용기가 아니고 내 굳어있는 몸을 펴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본능이었으리라… 


     성인 초보 발레는 스트레칭 30분과 30분의 기본자세수업으로 총 60분간 진행된다. 

이른 아침 통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클래식 음악에 맞춰 진행되는 스트레칭 수업은 나에게 필요한 수업 그 자체!  물론 일자 찢기를 못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발레 바 위에 스스로 발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나 밖에 없었지만 부끄러움은 없었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가도 내 실력도, 말길 못 알아듣는 것도 여전했지만, 발레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을 닮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백조의 호수 공연을 혼자서 보러 갈 만큼의 요동이었지만, 언제 가는 나도 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 역시 말끔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나는 그래도 이른 아침 발레 수업을 듣는다. 나는 이미 여러 배움을 통해 나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은 편이며 허황된 희망을 품는 일도 없다. 마흔이 넘어 더 단단해진 게 있다면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아 지려고 하는 노력보다 빠짐없이 나가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나에게는 생존 발레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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