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출퇴근하는 내가 운전을 할 이유는 없었다.
다들 내 나이가 되면 운전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운전을 하면 기동력이 생겨서 어디든 갈수 있다고 했다. 장롱면허는 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차를 살 수있는 재력이 생길때 구매하고 바로 운전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영국 유학파답게 BMW MINI를 끌고 호기롭게 한손운전을 하는 멋진 신여성을 꿈꿨다. 하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런 때라는건 오지 않았다.
세일즈 팀으로 부서를 이동하고 잦은 외부 일정에 눈치 없이 보스의 차를 얻어 타거나 꼰대처럼 팀원들에게 운전을 부탁하는 신세가 되자, 여러모로 면허가 없는 게 부끄럽기 시작했다. 차가 없어도 면허는 있어야 된다는 친언니의 잔소리에 나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듯 손쉽게 면허를 취득하였지만, 애석하게도 내 면허는 7년짜리 장롱면허가 되고 말았다.
어쩌다 제주로 이직하며 차가 없이는 도무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섬에 갇히게 되자 자동차 구매는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었고 회사 동료의 도움으로 튼실한 중고 외제차 구매에 성공.
무려 CD가 들어가는 연식이 오래된 차였지만, "용용이" 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깊은 애정을 쏟아주었다.
빛나는 사회성으로 회사 동료들에게 돌아가며 운전연수를 받았지만, 옆자리에 누가 없으면 당최 시동도 못 켜는 탓에 나의 용용이는 쓸쓸하고 외롭게 주차장에 방치되었고, 그나마 배터리가 방전될 까 봐 일주일에 한 번 시동은 켜주는 나의 애정은 잊지 않았다.
운전대만 잡으면 심장이 "콩 쾅 콩 쾅" 했지만 운전은 많이 해봐야 는다는 지인들의 폭풍 잔소리에 회사 동료를 태우고 오름 나들이에 나섰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BMW를 박고 말았다. 용용이 뒤에 붙여진 왕초보 스티커를 보자 BMW에서 내린 여자는 더 위풍당당하게 나의 과실을 주장하고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뜬금없이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남편 없는 설움을 느꼈다.
나의 두 번째 사고는 고작 30일 뒤 어이없게도 집 앞에서 일어났다.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칼퇴를 하고 집에 돌아와 주차를 하려다 뒤에 오는 싼타페를 보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좌측 깜빡이를 켜지 않은 나의 잘못. 풍채가 좋은 아저씨가 싼타페에서 내렸다. 두 번째로 남편 없는 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고작 500만 원짜리 중고차를 타면서 연간 180만 원의 보험료를 내는 처지가 되었다.
그날 밤 둘째 형부는 전화를 걸어와 어쩌다 처제가 거리의 무법자가 됐냐는 핀잔을 주고 자동차 수리에 대한 절차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의 세번째 사고는 신호등없는 사거리 교차로였다. 시속 30키로로 서행하고있었지만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모든게 슬로우 화면으로 동승자의 엉덩이가 좌석에서 40센치는 떠오르는게 느껴졌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용용이는 찌그러지고말았다. 다행이 이번에는 내가 피해자였지만, 신호동없는 교차로의 사고는 10:0이라는게 없단다. 일 년사이 세번째로 남편없는 서로움을 느꼈다.
세번째 사고로 나는 운전하는게 더 무섭고 심장뛰는 일이되었다. 나의 기동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의 초보 운전은 의외로 나를 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7개월이 되도록 업무가 늘지 않는 사원 하나가 있었는데 운전대를 잡으면 유독 그 사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설픈 시절이 없었던 것 같은 라떼의 시절이, 내 꼰대의 기질이 어쩌다 거리의 무법자가 되면서 뜻밖에 개선되고 있는것이다.
인명 피해가 없는게 천만다행이라며, 배움에는 지불이 따르는 법이라는 지인들의 위로가 이어졌지만 보험료로 180만원 내보지 않는 자들은 내 마음을 이해할수없다. 운동감각은 제로에다가 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주차의 논리를 간파하고 핸들을 조작하기에는 정말 많은 시간이 들것이다.
MINI를 끌고 섹시하게 운전하는 베스트 드라이버 골드 미스를 만날려면 또 한번 강산이 변해야겠지만, 운전을 잘하게 되는 그런 헛된 꿈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