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네 살 여고 1학년, 그리고 나의 엄마

by 정양갱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고 남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소개하기 좋은 소재다. 예순, 일흔의 나이에 교복을 입고 일반 고등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어머님들은 얼마나 매력적인 방송 소재인가. 정순 어머님에 대한 섭외는 그렇게 시작됐다.


올해 3월 한 일반계 고등학교 입학식 기사를 접했다. 10대 여고생들 사이에서 만학도 어머님들이 교복을 입고 입학식을 하는 사진은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어머님들이 중학교 교육과정까지 공부했다는 평생학습관에 방송 출연 가능 여부를 물어봤고, 학습관에서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어머님 중 한 분을 연결해 주셨다. 고등학교 측에 수업과 학교생활 촬영 협조도 구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만학도 어르신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성인반이 운영되는 학교는 전국에 두 곳뿐일 정도로 굉장히 드문 경우인데, 이 고등학교는 올해 처음 성인반 운영을 시작했다. 그동안 학습관에서 초중등 과정을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어르신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배울 곳이 없어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학습관 선생님들과 지자체, 교육청, 학교 측이 뜻을 모아 성인반 운영을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만학도 어머님 중에서 소개받은 정순 어머니는 올해 예순넷, 젊어서 요식업에 종사하며 살림을 일으키고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내셨다고 한다. 학습관에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건 4년 전쯤. 예순이 넘어 공부를 시작하려고 마음먹게 된 계기와 고등학교 진학에 도전한 이유가 궁금했다.


"4년 전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해야 했어요. 수술실로 들어갈 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부모님도 잘 모셨고 아이들도 최선을 다해서 보살폈는데 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예요. 옷 한 벌도 선뜻 못 사고 이대로 죽게 되면 ‘정순아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내가 수술실에서 살아서 나가게 되면 오로지 너만을 위해 살게. 건강해지면 하고 싶었던 공부나 원 없이 해보자...... 새벽 3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숙제하고 등교해요. 공부하는 게 정말 재밌어요. "

공부하는 게 재밌다는 말씀은 진심이었다.


"저는 어릴 때 교복 입은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교복 입고 버스 타고 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울었어요.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면서 울었어요. 이번에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교복을 맞추고 남편에게 그랬어요. 이제 한이 없다고 내가 죽게 되면 교복을 입혀서 묻어 달라고... 너무나 입어보고 싶었던 교복이라 다른 친구들은 셔츠 하나 사는데 저는 교복 셔츠를 5개나 사서 원 없이 입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교복 셔츠를 빨아서 빨랫줄에 걸어두면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아요. 제 마음도 그 나비처럼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지금은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인터뷰 중에 터진 눈물은 그치기 힘들어졌다. 흐려진 내 눈에서도 눈물이 속절없이 흘렀다. 눈물 사이로 보이는 정순 어머님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떨면서 울고 있었는데, 어른거리는 그 모습에서 50여 년 전 소녀가 보였다. 그 소녀의 모습은 엄마의 여고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갔다.




엄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임실 산골에서 나고 자랐다. 1955년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 그 시절 가난한 농촌에서 7남매 중 여섯째인 딸에게 고등학교는 언감생심이었지만, 엄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학교, 중학교까지는 육성회비를 늘 밀리면서도 꿋꿋하게 교실 뒤에 서서 공부하며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하교 후에는 밭 매는 외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해질 때까지 울고불고 떼를 쓰며 공부를 이어갔지만,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없는 산골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던 엄마는 간도 크게 서울로 떠났다. 집에서 학비를 대줄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적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는 영등포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150cm 남짓한 작은 키에 얼굴에서 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유난히 큰 눈, 까만 단발머리였던 엄마는 낮에 공장 일을 마치고 갈 수 있는 학교라도 좋았다고 했다. 밤공부를 마치고 하숙집으로 가는 길에 월급날이나 누렸을 호사, 호떡을 하나 사 먹는 게 그 시절 유일한 낙이자 사치였다고도 했다. 고단했지만 내일을 위해 기꺼이 저당 잡힌 오늘을 견디며 버텼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의 하숙방에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다. 몇 시간이나 방치되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엄마는 하숙집 아줌마에게 발견됐고, 중환자실 산소통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지만 의식을 쉽게 찾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의 한쪽 종아리는 뼈와 살이 붙은 심한 화상 상처가 남아 있는데, 사고 때 생긴 상처라고 했다.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온 직후 엄마는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엄마는 잃었던 기억을 조금씩 찾았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는 접은 채 아빠를 만났고 가정을 꾸리며 삶을 이어갔다.


과거 사고 얘기를 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엄마는 똑순이로 돌아왔고,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거실에서 내게 시 한 편을 술술 읊어 줬다. 노천명 시인의 <사슴>. 연탄가스 중독사고 이후 의식을 찾은 엄마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읊었던 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엄마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 무렵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배웠던 시였을 테지. 얼마나 공부하는 게 좋았으면 가족의 얼굴을 잊은 상태에서도 그 시를 붙잡고 있었을까.


예순네 살 여고 1학년 정순 어머님을 만나고, 엄마의 여고시절을 그리며 내내 마음이 아렸다.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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