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주술마녀 1호'
오는 11월 아빠가 팔순을 맞는다. 팔순을 기념해 가족 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나온 건 작년이다. 친정 가족은 부모님과 오 남매, 오 남매의 자식 아홉을 합해서 모두 스물한 명. 직장 휴가와 아이들의 학사일정을 맞춰보자고 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행지부터 여행일수까지 무엇 하나 맞추기가 쉽지 않아 항상 원점이었다. 올해 5월 가족 모임 때 만나면 어떻게든 결론을 보자고 우리는 미리 다짐했다. 가족 모임에서 꽤 긴 시간 얘기를 나눈 결과 우리는 해외를 고집하던 여행지를 국내로 좁히기로 했다. 모임 이후 단톡방에서 더 논의한 끝에 '10월 중 금, 토, 일 제주도'로 정했다. 이제 항공권만 예약하면 된다.
5개월도 더 남았고 요즘 제주 여행이 줄었다고 하던데, 예약할 수 있는 항공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돌아오는 날에도 여행지 몇 곳을 둘러보고 오려면 예약할 수 있는 항공권은 더 적었다. 우리에게 좋은 날짜는 10월 24, 25, 26일로 정해졌고, 전국에 흩어져 사는 오 남매는 시간에 맞춰 각자 항공권을 예약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단톡방에 오 남매 중 1호, 언니의 메시지가 떴다.
"잠깐... 급하게 생각하지 마"
"?"
"여럿이 여행 갈 때 그렇게 막 정하는 거 아니야.
날짜 다 보고 차분히 정해야 해.
10월 25일은 안 돼.
‘복단일’이야"
...
"복단일?"
"복단일이 뭐야?"
"복 단열? 단열해야 한다고?
"그게 뭔데?"
‘복단일’이 등장했다.
조용하던 채팅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복단일!
복이 끊기는 날
이런 날은 이사나 여행 가면 안 돼.
저번에 제주항공 사고 났던 날도 복단일이었어.
안 그래도 나 올해 여행 가지 말라고 했는데,
복단일은 안 돼"
쉼 없이 울려대던 단톡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1호가 이야기한 복단일은 한 달에 열흘 넘게 있었다.
막둥이 5호가 나섰다.
"그냥 가지 말자. 그런 거 다 따지면 우리 여행 못 가! 그런 날에도 다른 사람들 다 여행 가고..."
5호는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연구원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워치 같은 제품이 출시되기 전에 테스트해서 오류를 검증하는 업무를 주로 한다. 그런 5호가 '복단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잠깐 정지 상태였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후 검색창에서 찾아보고 '복단일=미신'이란 값을 출력해 낸 뒤 한 말이었을 거다. 가족처럼 오래 같이 산 사이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초능력처럼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 5호는 이번 여행의 일정과 항공권, 차편을 일사천리로 알아보고 비교해서 알려줬다. 나는 그의 MBTI를 모르지만 T와 J가 반드시 있을 거란 것도 확신한다. 평소에 '안 좋은 건 피하는 게 좋지'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언니는 바로 내게 전화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내가 편들어주길 바란 모양인데 나는 중립을 지켰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5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정 그러면 일정이 좀 줄더라도 다른 날짜로 맞춰보든가, 5호랑 직접 통화 한번 해봐."
한동안 단톡방에 정적이 흘렀고 다시 5호의 메시지가 떴다.
"여러 사람 일정 맞추는 거 아무래도 힘든 것 같다. 이번에는 우선 형(4호; 5호와 일란성쌍둥이) 가족이랑 우리 가족이 부모님 모시고 다녀올 테니까, 다 같이 여행 가는 건 천천히 다시 일정 맞춰보자"
잠시 후 다시 5호의 메시지가 왔다.
"매형이랑 ㅇㅇ(조카)는 10월 24~26일에 누나 빼고 제주도 같이 갈 수 있다는데...“
형부와 조카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언니를 버리고, 우리의 여행 일정에 기꺼이 같이 가겠다는 적극성을 보였다. 형부의 차에는 우주 만물의 기운을 품고 있을 것 같은 작고 동그란 은색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 있다. 그 차를 탄 조카들은 그게 특별한 버튼인 줄 알고 눌러보기도 했다. 그 스티커는 내 차에서도 아빠 차에서도 친정집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카들이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갈 때 언니는 그 스티커 모양의 동전 같은 걸 손에 쥐여줬다. 특별한 이유를 대기 어렵지만, 형부는 친정집에서 언니보다 신뢰를 받고 동정을 받고 있다. 부모님은 물론 언니를 뺀 우리 남매들은 형부에게 왜인지 모르게 항상 조금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단톡방은 그 후로 다시 조용해졌다.
며칠 후. 단톡방에 5호네 집으로 배송된 쑥 사진이 올라왔다. 5호는 팔려고 내놓은 아파트를 몇 년째 못 팔고 있는데, 언니가 그 아파트에 가서 쑥을 태워보라며 '태우는 쑥'을 보냈다고 한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5호는 이런 말은 또 듣는다. 몇 년의 기다림이 뭐든 믿고 뭐든 하고 싶게 만든 것인지, 언니의 말을 듣고 이미 그 아파트 신발장에 가위를 가져다 놓은 지도 1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태우는 쑥을 보내줘서 고맙다며 땀 흘리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길이 없지만, 과거 나도 몇 달째 집을 팔지 못했던 나도 언니 말을 듣고 신발장에 가위를 둔 후, 며칠 만에 계약이 성사됐던 적이 있다.
우리 집 주술마녀 1호가 이야기해 주는 신비(?)한 이야기들은 대체 어디까지 들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한데 묘하게 빠져드는 마력을 거부하기가 힘들다.
1호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팔순 기념 가족 여행을 언제쯤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