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2호

by 정양갱

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종이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 또래처럼 보이지만 둘은 자매다. 엄마 뱃속에서 여덟 달도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는 1호는 여섯 살이 되도록 두 살 어린 2호보다 크지 않다. 이웃들은 이란성쌍둥이냐고 자주 물었다. 키와 몸무게는 비슷해 보여도 생김새며 하는 짓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기 때문이다.


1호 앞에는 종이로 만든 화려한 옷과 가방, 모자 같은 것들이 줄을 서 있다. 만화 속 여주인공처럼 늘씬한 종이 인형 둘은 1호의 양손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방바닥에서 콩콩콩 뛰면서 시장도 가고, 병원도 가느라 바쁘다. 2호 손에는 손톱만 한 강아지 종이 인형 하나가 쥐어져 있다. 좀처럼 여백이 없는 1호 목소리 사이에 "멍멍~"하며 추임새 같은 소리를 더할 뿐이다.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1호를 보고 할머니는 젖도 못 빨고 숨도 잘 못 쉬는 게 사람 구실 할 수 있겠냐며 안아보지도 않으셨다고 했다. 귤만 한 머리를 달고 태어나 모유든 분유든 제대로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아빠는 주변에서 좋다는 건 다 구해 먹였다고 한다. 그 정성 덕분이었을까. 1호는 또래보다 체구는 작아도 야무지게 자랐다. 키 크는 건 더뎌도 말은 빨랐다. 유난히 반짝이는 까만 눈에, 까만 단발머리를 흔들며 할 말 하는 1호. 15개월 늦게 태어나 잘 먹고 잘 크는 순한 동생을 속여먹고 놀려먹는 게 일상이었지만, 부모 눈엔 그저 예뻤다.


종이 인형 놀이에 싫증 날 때쯤 아이템풀 선생님이 학습지를 배달하러 오셨다. 공부하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1호와 2호는 연필을 손에 쥔다. 1호는 공주 옷을 그리고 2호는 학습지를 푼다. 2호가 학습지 숙제를 마치자 1호는 자기 학습지를 2호에게 준다. 2호는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두말이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공부에 흥미가 없어 보이는 1호를 위해 아빠는 피아노를 사주셨다. 건물보다 논밭이 많던 동네에서 고급 피아노가 집에 들어오던 날, 2호는 앞뒷집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문제는 1호는 '피아노'에만 흥미가 있었지, ‘피아노 치는 것’에는 금방 싫증을 냈다는 거다. 그래도 1호는 1년 이상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2호는 피아노 치는 1호 옆에서 종이 건반으로 피아노를 쳤다. 마침내 1호가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다며 울고불고 떼를 쓰고 나서, 2호는 피아노 학원에 갈 수 있었다. 2호는 바이엘 한 권을 1주일도 안 돼서 다 뗐다.


2호 밑으로는 날 때부터 인형 같은 외모의 여동생이 있다. 아빠 친구들은 모였다 하면 지겹도록 자기 딸 삼겠다는 말을 했다. 여동생 밑으로는 일란성 아들 쌍둥이가 있다. 아빠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구호에 공감하며 딸 둘을 낳고 가족사진을 찍으셨지만, 엄마와 합의를 보지 못했던 거다. 시아버지에게 받은 아들 없는 설움 때문인지, 남아선호사상 때문인지 엄마는 임신을 강행(?)하셨고 끝내 아들 쌍둥이를 품에 안으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호는 3개 대학을 거쳐가며 적성을 찾았다. 점수에 맞춰서 첫 번째 대학에 진학했고, 첫 대학에서의 실패를 경험 삼아 취직이 잘되는 두 번째 대학에 진학했다. 두 번째 대학에서도 적성을 찾지 못한 1호는 세 번째 대학에서 의상학과에 입학했다. 다행히 세 번째 대학에서는 졸업장을 받았다. 그 졸업장에는 옷을 좋아하지만 옷 만드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던 1호의 실습 과제와 졸업작품을 바느질한 2호의 지분이 있었다.


2호는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에 진학했다. 재학 기간 휴학은 생각하지 않았고 중국어를 복수 전공하고 교직 이수를 해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중국 대학 교환학생으로 가지 못한 게 한이 되었지만, 살면서 많은 일이 그렇듯 지나고 보면 크게 한 될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의상디자이너가 될 줄 알았던 1호는 수완 좋은 옷가게 사장님이 됐고 파란만장한 러브 스토리 끝에 결혼했다. 부동산에도 감각이 있어 집이 세 채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보탠 2호는 결혼할 때도 모아둔 적금으로 조용히 시집갔다. 엄마는 평생 가족에게 약한 모습 보인 적 없는 아빠가 자식들 중 유일하게 2호 결혼하기 전날 밤 많이 우셨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릴 적 내가 마냥 투명인간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다. 마음속에 빙하처럼 얼어있던 기억들이 녹아내렸다.


(덧. 이제 1호는 2호에게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신상을 빼뒀다가 원가에 주고 있다.

교육열 심한 도시에서 아들을 키우며 주워 모은 정보를 2호의 자녀들에게까지 물어다 주고 있다.

과거 1호는 슈퍼 오지라퍼이기도 해서 어릴 적 학교에서 받아온 200ml 우유에 물을 부어 동생 넷에게 나눠 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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